기차의 꿈

Train dreams / netflix

by allen rabbit

<기차의 꿈> 이 영화는 왜 이런 제목을 갖게 됐을까.

주인공은 깊은 골짜기에 선로를 놓는 일을 한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격려한다. 하지만 협곡을 뚫어 만든 이 기차선로는 몇 년 뒤에 건설된 새로운 다리에 자동차들이 다니면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기차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다. 무시무시하게 큰 덩치와 소리 그리고 무엇이든 실어 나를 수 있는 힘까지. 기차는 그렇게 사람과 짐을 싣고 영원히 달리는 꿈을 꾸었겠지만, 차츰 자동차와 비행기에 자리를 내준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묻는다. 저게 무엇이냐고. TV에는 우주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 영화가 남긴 잔영 속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조용한 오두막. 그 주위를 감싼 황량하고 적막한 자연의 숲과 개울. 그 속에 계절의 변화보다 그 적막함이 자꾸 나를 붙들었다.


고아가 되어 먼 친척 집에 보내진 로버트는 철마다 떠도는 벌목꾼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운명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개울가에 소박한 오두막을 짓고 살아간다. 그는 철마다 일거리가 생기면 벌목꾼으로 주 경계를 넘어 일을 하러 다녔다. 이 외로운 오두막은 아내와 아이가 있을 때는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부부는 어떻게든 더 잘살아보려고 애쓴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 벌목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부부는 로버트가 이번에 마지막으로 벌목을 다녀오면 대출을 받아 제재소를 차리자는 희망을 그린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한다. 큰 산불로 외딴 오두막에 있던 아내와 아이는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에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다. 산불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차마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재가 되어버린 집터를 떠나지 못하고 혹시 살아 있을 아내가 찾아올까 노숙하며 비를 맞는다. 그리고 로버트는 다시 같은 곳에 오두막을 짓는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어느 새벽에 깨어 일어났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나 그런 막막함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시간들. 바로 그때 느껴지는 적막감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막막한 걱정이 그늘이 되어 어두운 적막 속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기차의 꿈>에서 로버트가 오두막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노동을 끝내고 모닥불 앞에 앉아 있을 때의 적막이 그렇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와 잔가지 바스락대는 소리 등등은 로버트의 막막함을 더한다.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로버트가 기차선로를 건설하는 노동을 할 때이다. 말을 나누진 않았지만, 두 달간 함께 일했던 중국인이 갑자기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보탬도 없이 이 장면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로버트는 잠깐 끌려가는 중국인의 다리를 붙잡았다가 걷어차인다. 다리를 붙잡은 것이 중국인을 돕기 위해서인지, 끌고 가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다. 로버트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기도 전에 중국인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에는 이런 느닷없는 죽음이 많다. 그때마다 카메라는 로버트의 얼굴을 주시하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후회나 연민, 분노가 아니라 도리어 숙명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나 두려움을 보았다. 삶의 아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내의 얼굴은 어딘가 수도사의 표정을 닮았다.


이 적막한 영화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인가 반짝이고 즐겁고 멋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출근을 위해 건널목에서 불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새로운 직장의 면접을 위해 만원 지하철 안에 서 있을 때, 힘들고 어려운 일을 지내고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 순간들은 반짝이고 즐겁고 멋진 순간이 아니다, 그저 이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서 우리가 묵묵히 견뎌야 할 시간일 뿐이다. 영화는 그런 순간들로 가득하다. <기차의 꿈>에서 로버트는 희망도 없이 그 순간들을 묵묵히 견딜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들의 적막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그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기차도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할 진데 보잘것없는 보통의 인간들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끊임없이 묻는다. 어째서 나의 사랑이 이렇게 끝났는지, 어째서 내 삶은 이토록 보잘것없는지, 어째서 행복이 허락되지 않는지. 문득 이 질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적막하고 막막한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물러나는 수밖에.


벌목을 하면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한이라는 노인 역시 황망하게 죽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또 다른 노인 그레니어는 이렇게 말한다. “한은 이렇게 말했다. 나무와 벌목꾼은 친구다. 가만히만 둔다면, 하지만 칼날을 밀어 넣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고 나무는 살인자가 된다고. 하지만 안은 그 나무를 건드린 적이 없다. 그냥 죽은 나무였다. 그래서 이게 어떤 의미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벌목꾼이 나무를 건드려 죽는 것은 인과의 관계다. 하지만 안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죽은 나무에 의해 죽었다. 그러니 인과 관계가 없다. 그래서 그레니어는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중국인은 종종 로버트의 머릿속에 현현한다. 중국인의 죽음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인과가 없다. 뒤에 로버트는 산불로 가족을 모두 잃은 것이 중국인의 죽음 탓이라고도 생각한다. 산불과 중국인과 로버트는 서로 아무런 인과가 없는데 인과가 만들어졌다. 삶은 납득되는 인과의 연쇄가 아니다. 느닷없이 닥치는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모든 순간들이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견디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로버트가 집 앞에서 소녀를 구했을 때, 그는 소녀를 자신의 죽은 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날 소녀가 사라지자 찾아 나선다. 자신이 가장 필요할 때 없었던 탓에 가족이 모두 죽었다고 자책하는 로버트이다. 그는 소녀가 딸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딸이 찾아왔다고 믿고 다시 찾으려 한다.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는데도, 그는 마음으로 인과를 만들어 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계곡에 갑자기 던져진 중국인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산불에 죽은 아내와 딸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어느 새벽까지. 이처럼 우리는 느닷없이 닥치는 삶의 순간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로버트는 중국인과 산불에 인과를 부여해 납득하려고 애쓴다. 참회하고 아픔을 견딘 끝에 딸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다시 사라졌다고 괴로워 한다. 이렇게 또 스스로 부여한 인과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로버트가 혼자 오래 앓고 난 뒤에 일어난 어느 날. 그는 담요를 끌고 집을 나간다. 어느새 하얗게 눈이 덮인 세상에 로버트는 담요를 두르고 서 있다. 그를 짓누르던 고통은 이제 하얀 눈에 덮였다. 이 겨울이 지나면 고통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푸르게 새싹이 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차의 꿈>처럼 여전히 부질없는 꿈을 꾸며 그저 순간순간의 적막을 견뎌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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