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 박정민, 신세경, 박해준, 류승완 감독
영화 <휴민트>는 이상한 영화다.
<휴민트>는 human intelligence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기획되던 지난 2024년에는 국방부 정보 사령부 소속 군무원이 정보 작전 요원들의 신상과 그들이 관리하는 휴민트 등에 대한 정보를 유출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스파이의 세계에서 휴민트를 포섭하는 일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들여 구축된 휴민트는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는 존재다. 만일 발각이 된다면 정보망이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휴민트 본인의 안위도 큰 위협을 받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지난 24년도의 정보 유출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거의 모든 휴민트 조직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속에서 정체가 드러난 휴민트들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는 감히 상상이 잘 가지 않을 정도다. 때문에 나는 영화 <휴민트>가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인공 조과장이 관리하던 김수린이라는 휴민트가 죽은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과장은 채선화라는 새로운 휴민트와 접촉한다. 그는 그녀에게 춥다며 카디건을 덮어주고 어머니의 약도 챙겨줄 만큼 다정하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어떤 정보를 받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상하게 영화 <휴민트>에서의 휴민트는 정보를 주는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저 안타까운 현실을 살고 있는 북한 주민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는 어떤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조과장을 보여주는 풀샷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조과장이 소지품을 챙기는 장면이 보여진다. 이 장면은 <세븐>에서 모건 프리먼이 탁자에 가지런히 놓인 소지품을 하나씩 챙기는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씬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침대 위에 놓은 양복 상의에서 먼지를 떼어내는 동작이었다. 모건 프리먼이 어떤 인물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기 전에 소지품을 꺼내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놓아두는 조과장은 과연 어떤 사람인 걸까? 이를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모든 영화의 첫 장면은 언제나 야심만만하곤 하다. 하지만 <휴민트>의 이 첫 장면은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과장은 김수린의 죽음으로 알게 된 러시아 인신매매 조직을 파헤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하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러시아 인신매매 조직은 잊히고 영화는 채선화를 포섭하는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리고 평양에서 내려온 박건이 채선화의 옛 연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야 겨우 이야기는 가닥이 잡힌다. 러닝타임이 거의 50분이 지나서의 일이다. 하지만 이 가닥은 휴민트에 대한 조과장의 연민도, 또는 휴민트를 활용해서 얻는 정보와도 별 관계가 없는 가닥이다. 박건과 채선화의 멜러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조과장, 박건, 채선화는 모두 이 영화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 조과장이 채선화에게 친절한 것은 김수린의 죽음 때문일까? 평양에서 온 박건은 황치성의 비리를 캐내려고 온 걸까? 아니면 자신을 피해 숨은 채선화를 찾기 위해서 온 걸까? 조과장은 위에서 뭐라든, 동료가 뭐라든 제 갈 길을 간다. 박건은 채선화 때문에 황치성에게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다닌다.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런 굴곡은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하지만 <휴민트>의 인물들은 이런 굴곡을 겪지 않는다. 오로지 직진이 있을 뿐이다.
남북한의 문제, 헤어진 남녀의 재회. 북한 여성의 인신매매. 그리고 휴민트. 감독은 이 소재들을 왜 이렇게 다루었을까? 박건과 채선화의 멜러에 방점을 둔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헤어졌던 연인으로 관계를 되돌리려 애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휴민트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남북 분단의 비극이나, 북한 여성의 인권은 오로지 액션을 위해 존재하는 미장센들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감독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는 내가 엉뚱하게 이상한 것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독은 남북문제, 휴민트, 인신매매 등을 이용해 순수한 액션영화를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과장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다시 탁자 위에 소지품을 가지런히 놓아둔 조과장이 침대에 눕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채선화가 박건의 사랑을 확인하는 첩보극의 외피를 쓴 순애보가 되면서 조과장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세븐>의 모건 프리먼은 7대 죄악을 완성하게 될 순수하고 다혈질인 형사 브래드 피트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가지런히 놓아둔 소지품을 챙기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감독은 박건에게 브래드 피트의 역할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일까? 조과장이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의 증인이 되는 역할이라면 채선화에게 친절했던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조과장의 휴민트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채선화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결국 다시 침대에 누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휴민트>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