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미터 100 METERS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by allen rabbit

<100미터> 불과 10초의 승부.

내가 지금 쓰는 이 문장을 다 쓸 시간이면 100미터 선수들은 이미 결승선에 들어갔다. 이렇게 짧은 경기를 이야기로 다룬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짧은 시간에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다루었고 그 결과는 경이로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위해 교묘하게 쌓아 놓은 내러티브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영화는 로토스코핑이라 불리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이 연기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그것을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스포츠 물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 영화로 알게 됐다. 이 영화 인물들의 동작은 다른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데,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건들대는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연출도 깔끔하고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도가시가 고미야에게 지는 우중(雨中) 경기 장면은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연출이었다. 이만큼이나 주인공의 마음을 잘 전달하는 장면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훌륭했다.

특히 나는 엔딩의 마지막 시합 직전의 시퀀스가 너무나 좋았다. 시합 당일 아침 호텔에서 일어난 도가시가 혼자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까지 가는 시퀀스는 이 뜨거웠던 100미터 시합의 열기를 잠시 식히고, 이 영화가 지금까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왔는지 관객이 조용히 곱씹을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불과 10초 만에 승부가 나는 경기를 다루는 영화에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이 긴 경기장 출근 씬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가 익숙하지 않았던 지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본 만화 특유의 애니메이션적인 비장함이다. 일본 최고의 100미터 선수 자이쓰는 "공포는 불쾌한 게 아니다. 안전은 유쾌한 게 아니다. 불안은 너 자신이 널 시험할 때의 감정이다. 영광 앞에서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보잘것없는 세포 집합체인 인생 따위 내 던지면 된다."

불안이 자신을 시험할 때의 감정이라니, 놀랍고도 멋진 대사다. 하지만 또 달리 보면 너무나 일본 애니스러운 대사라 여전히 잘 소화가 안 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내러티브의 방식이다. 보통의 스포츠 영화라면 주인공의 시작과 영광, 이어서 찾아오는 좌절과 극복의 서사를 그리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도가시가 주인공이지만, 고미야 역시 주인공급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국면마다 매번 다른 선수들을 등장시키면서 트랙 위를 달리는 모든 선수의 감정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선수들이 달리는 트랙과 100미터 시합 자체가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도가시는 타고난 스프린터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이 재능으로 1등을 할 수는 있지만 왜 달려야 하는지 목표가 없었다. 그때 그는 고미야라는 친구를 만난다. 그는 순수하게 달리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는 존재다. 그리고 또 다른 선수 니가미가 등장한다. "달리기는 단순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리를 찾고 머물고 싶다면 항상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고미야는 100미터가 절대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도가시를 이기려고 다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력 질주를 한다.


한편 고미야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도가시를 이길 수 없었고 부상까지 입었다. 그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제 속력을 내지 못한다. 그가 가진 불안은 냉정한 승패의 세상에 사는 선수라면 누구나 고민할 문제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자이쓰의 벼락같은 말로 떨친다. "깊이 생각하지 마. 세상을 만만하게 봐."

이렇게 영화는 선수들이 달리는 이유와 달릴 때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승패의 불안 등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는다.


도가시가 고등학교에 들어와 달리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달리는 즐거움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즐거움을 깨닫고 니가미를 만난다. 그는 허리를 다쳐 운동을 그만둔 상태이지만 도가시를 만난 덕에 다시 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중에 도가시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 다시 변주된다.


10년 뒤 사회인이 된 도가시가 무기력으로 무너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슬럼프를 겪는 도가시에게 이번에는 가이도가 등장한다. "달리는 이유를 알면 현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어."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가이도 역시 만년 2등 신세인 현실을 견뎌내는 중이다. 그리고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를 부상과 슬럼프를 넘어서며 도가시는 말한다. "앞으로도 어제처럼 반복해서 살아갈 바엔 오늘 전력 질주로 태워버리겠어." 아마 이것이 100미터에 임하는 선수들의 진짜 마음이리라.


영화 속 선수들 모두 자신의 문제에 봉착해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넘어서고, 그것으로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며 함께 성장해 간다. 이제 100미터 트랙 앞에 선 선수들의 서사가 모두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마침내 또다시 승부를 겨루기 위해 트랙 위에 도가시와 고미야가 나란히 선다. 이 시합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감독 역시 승부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도가시와 달리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고미야라는 두 선수의 경쟁이라는 외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 던져지고, 또 다른 선수들을 통해 해결하며 내러티브를 쌓는다. 단 10초 만에 승부가 나는 이 폭발적인 경기가 선수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차곡차곡 보여준다.

자이스는 말한다. "희망, 실망, 영광, 좌절, 피로, 만족, 초조, 성취, 희로애락을 100미터에 담아 최고의 10초를 만끽하는" 시합이라고. 마치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굽이굽이 언덕과 계곡을 타고 오르는 등산처럼, 차곡차곡 쌓인 선수들의 내러티브는 마침내 정상의 절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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