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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Jul 02. 2023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길 위에서>

전시회 리뷰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길 위에서>

전시장에 들어가면 처음 보게 되는 그림 중 하나가 <계단>이다. 스케치 차원으로 목탄으로 한번 그리고 다시 유화로 한 번 더 그렸다. 나는 이 두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이 두 개의 그림은 내게 호퍼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줬다. 목탄으로 그린 <계단>의 계단은 현관문으로 경사져 있었지만, 유화로 그린 계단은 마치 경사가 없는 것처럼 완만하게 그려져 있었다. (1) 그리고 이 두 개의 <계단>은 구도상 뚜렷한 다른 점이 있다. 목탄 <계단>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원근법 등을 이용한 보통의 구도에 가깝게 그렸지만, 유화 <계단>은 의도적으로 이런 장치를 지워버린 구도였다. (2) 그리고 또 다른 특별한 점은 이 그림이 지극히 현실적인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으로 나가면 흔히 마당과 그 너머 울타리 또는 다른 집이나 가로등 따위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 속의 현관 너머엔 그런 것이 없다. 마치 현관 바로 앞에 절벽이 있고 그 뒤로 멀리 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는 듯하다. 마치 산 정상에 혼자 지어진 집 같아 보인다. 게다가 이 산은 원근감도 느낄 수 없도록 거의 덩어리로 뭉개져 있다. (3)     


전시장에는 호퍼가 파리에 머물면서 그린 풍경화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쓰여있다. 인상파 그림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는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이다. 매일, 매시간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루앙 성당을 그는 많이도 그려댔다. 비 올 때, 해가 비스듬히 비칠 때, 아침, 저녁으로 무지하게 그렸다. 노인네 체력 정말 대단하네. 하고 생각할만한 그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보는 아침의 루앙 성당과 저녁의 루앙 성당은 변함없이 같은 성당이다. 하지만 모네는 매 순간 루앙 성당을 볼 때마다 그 순간 느끼는 찰나의 감정을 그림 위에 끼얹는 것이다. 그래서 모네의 수많은 <루앙 성당> 들이 모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수많은 루앙 성당을 “발명”해 낸 셈이다. 호퍼가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은 그것에 가깝다. 거대한 물체를 비추는 햇빛이나 어떤 불빛이 순간 그에게 전하는 어떤 심상을 잡으려 애쓴 것 같기 때문이다. (4)

그의 풍경화의 또 다른 특징은 화면에 횡으로 긴 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가로선이 있다. 때로는 지붕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리이거나, 또는 그냥 지평선이기도 하다. 2차원에서 구도를 잡을 때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기본적으로 근경, 중경, 원경을 염두에 둔다. 이것이 구도의 스펙터클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퍼의 그림은 이걸 피하거나 일부러 파괴한다. 그의 그림에서 횡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은 깊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호퍼의 그림은 2차원에 붙잡힌 피사체들의 구성과 그 피사체에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질곡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5)

전시장에는 그의 데뷔 이전의 삽화들도 전시되어 있다. 나는 이 삽화들에서도 구성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어딘지 성급하게 앵글을 자른 것 같은 느낌. 예를 들면 남녀가 나란히 프로필로 서 있는 삽화에서 남자는 전체 화면의  아래위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보통은 이렇게 구도를 잡으면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에 헤드 룸을 주거나 하는데 그는 이 여유를 지 않았다. 마치 재빨리 두 사람을 포착하려 했다는 듯이. 그의 다른 삽화들도 그렇다. 어떤 장면을 포착하려고 찍은 스냅사진처럼 배경을 알 수 없게 성급하게 찍어 버린 느낌을 주는 구도로 그렸다. (6)하지만 그의 그림은 스냅사진일 수 없기에 의도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나를 사로잡은 호퍼의 그림은 단연코 1914년 작 <푸른 저녁>이었다. 그림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흐른다. 푸른 저녁 하늘. 그 아래 일본식 제등. 붉은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고, 그 아래에는 얼굴을 하얗게 칠한 피에로가 사람들과 앉아 있다. 배경에는 오로지 파란 하늘밖에 없는 이곳은 어디일까? 산 꼭대기일까? 절벽 위일까? 아니면 바다 위에 세워진 누각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긴장감을 잔뜩 품은 여자와 그 아래 탁자에 앉은 사람들의 방심한 순간이 파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 그림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이 작품도 울타리로 화면을 횡으로 자랐다. 이것으로 호퍼는 화면 속 인물들의 무심한 표정과 자세 그리고 각 인물 배치에 사람들의 시선을 더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선가 내가 바로 이런 풍경을 봤던 것만 같은 놀라운 기시감을 준다. 그리고 이런 각각의 요소들은 감상자들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1929년 작 <철길의 석양>을 보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분명히 저런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 기억 속에만 있는 풍경이다. 왜냐하면 그때 사진기를 들거나 핸드폰으로 그 석양을 찍었데도, 화면에는 불필요한 창문 프레임이 걸리거나,  저 노을 아래 누워 있는 구불구불한 산등성이의 나무가, 혹은 마을의 불빛이, 소실점으로 향해가는 철길이 같이 찍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넋을 잃고 보게 만든 기억 속의 그 석양이 아닌 다른 어떤 장면이다. 그러니까 단언컨대 내가 철길 위에서 본 석양은  호퍼의 그림과 같다. 달리는 기차에서 내 눈으로 보았던, 불타는 노을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뭉개지고 지워진 바로 그 석양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나는 그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5처럼) 일상적으로 보는 대상이 새롭고 다르게 보일 때 그것을 그림에 붙잡아 놓으려고 호퍼는 애를 썼다. (2처럼) 그러기 위해 그는 어느 정도의 왜곡을 감행했던 것 같다. (6처럼) 일상에서 마주치는 잠깐의 순간에 포착되는 풍경은 도리어 호퍼의 그림과 더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어떤 순간 우리가 보는 것은 오로지 관심을 가진 바로 그 피사체뿐일 테니 말이다.(4처럼) 마치 우리가 기차에서 마주친 석양이 호퍼가 <철길의 석양> 보여준 것에 더 까운 것처럼. (1처럼) 호퍼는 그런 정서와 찰나의 이미지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종래의 그림이 추구하던 구도를 일부러 비켜 간 것은 아닐까?(3처럼) 호퍼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림은 어딘가 실재하는 게 아니라 상상 속에 있는 이미지의 조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호퍼는 일 년 내내 그림을 그렸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은 한 해에 두세 개밖에 못 건졌다고 한다. 나머지는 버리거나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이 <푸른 저녁>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은 정말이지 사람이 있을 때 가장 빛난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에는 그의 유명한 그림들이 많이 오지 않아 아쉬웠다.

호퍼의 그림을 두고 현대인의 쓸쓸함을 표현한 거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정의하기에는 너무 아쉽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그가 어떤 찰나적인 감정을 전달하려고 그렸다는 것만 받아들이고, 감정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고 싶다. 어차피 그의 그림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느낌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이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그림은 언제나 매 순간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바로 그 점이 호퍼의 그림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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