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 문드러진 왜소한 육신의 부활은 가능한가?
고린도전서 15장 12-15, 19-2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부활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믿음 부족’을 훈계하는 사도 바울의 말에 떠오른 내 (얄팍한)궁금증
당신의 주장이 옳은 줄 내가 알고 또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베드로나 누가 같은 사도들만 봤지, 다마스커스로 향할 때 환시를 제외한다면, 실제 예수님을 본 적 없잖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등장인물이 품는 의문
페병으로 시한부 통보를 받은 무신론적 허무주의자 이폴리트는 로고진 집에 걸려있던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를 감상하고 이처럼 말했다.
“이상하게도 고통에 찢긴 이 인간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면 매우 특이하고 야릇한 의문이 생겨났다. 만약 그를 신봉하며 추앙했던 모든 제자들과 미래의 사도들, 그리고 그를 따라와 십자가 주변에 서 있었던 여인들이 이 그림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그의 시체를 보았다면, 그들은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저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만약 죽음이 이토록 처참하고 자연의 법칙이 이토록 막강하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생전에 자연을 물리치고 예속시켰던 자로서 그가 ‘탈리다 쿰!’이라고 외치면 소녀가 일어났고, ‘라자로야, 이리 오너라’ 하면 죽은 자가 걸어 나왔는데, 그런 자마저 이겨 내지 못했던 자연의 법칙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중략)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 그림 속에서 자연이란, 위대하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여 무감각하게 분쇄시켜 마구 삼켜 버리는 엄청나게 큰 첨단 기계처럼 보인다. 그 창조물은 자연 전체와 비견되고, 자연의 모든 법칙들과도 비견되고, 지구 전체와도 비견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지구 자체도 오로지 이 창조물의 탄생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이 그림에는 모든 것을 예속시키는 어둡고 불손한, 무의미하게 영원한 힘의 개념이 표현되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죽은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었던 추종자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일시에 분쇄된 그날 저녁 무서운 슬픔과 혼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아주 지독한 공포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각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사상을 안고 돌아갔으리라. 만약 이 스승이 처형 전야에 자신의 모습을 미리 그려볼 수 있었다면 선뜻 십자가에 올라가 지금처럼 죽으려고 했을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의문이 저절로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