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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Dec 14. 2022

The ecosystem of abyss

한예종 연극 [심해어 X] 감상문



  정신장애인 X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창작된 극이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다. 그런데 작가 X를 위해 마련해 놓은 초대석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아있다. 결국 극장의 문이 굳게 닫히고, 더 이상 X가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연극이 시작된다.     - 시놉시스


  원래 연극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딱히 뭔가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라는 행위 자체를 조금 어색하게 느끼는 것 같다. 비슷한 이유로 영화나 드라마 역시 크게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한예종에서 보고 온 ‘심해어 X’라는 연극은 나로 하여금 주저 없이 펜을 들게 했다. 연극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나에게조차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하에서는 연극을 보며 들었던 잡다한 생각에 대해 두서없이 풀어볼까 한다.      


  단연코 가장 좋았던 것은 각본이었다. 흔히 퍼진 대인공포증, 보다 넓게는 사회와 단절된 개인의 서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그 개인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개인이 주변의 도움으로 스스로의 처지를 극복하는 희망찬 경우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개인을 일종의 환자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 사람이 타인에 대해 갖는 공포는 일종의 병적인 증세이며, 그 사람의 서사는 병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맥락에서 관객이 보이는 동정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이라기보다 심리적 우월감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극 자체에서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의 지위가 ‘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간의 이런 흔한 서사를 깨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새롭고도 균형잡힌 이해의 폭을 보여주었다.     


  주인공 X는 왜 대인공포증을 앓게 되었을까? 관객은 그에 대해 어떠한 실마리도 잡을 수 없다. 그저 X가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초롱아귀를 통해서 약간의 편린들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롱아귀가 보여주는 것들 역시 증상들 뿐이다. 그는 사람 만나기를 힘들어하며 칩거한다. 그러면서도 외향적인 동생을 부러워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마주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이러한 여러 묘사들 중 어디에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극은 우리에게 그 원인이라는 것이 도대체 왜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듯 하다. 원인을 찾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증상을 치료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야는 이미 일종의 색안경이다. 이 극은, 그리고 극의 진짜 주인공이자 극 속의 극의 창작자인 X는 이런 세간의 시야를 단호하게 거부하기를 원한다.      


  극 중에서 X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X가 오지 않은 채 시연되는 연극은 배우들에 의해 곡해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을 보며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전까지는 동생이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언니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잘못된 행동에 용서를 구하고, 함께 손잡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뻔한 신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언니의 방문을 다시 두드리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동생 역할을 맡은 배우는 대사를 까먹는다. (솔직히 처음에는 진짜 까먹은 줄 알았다.) 그리고 더없이 극적이고 우아한 방식으로 모든 관객들을 흔한 신파의 미로에서 쫓아버린다. 이후 언니 역할의 배우와 동생 역할의 배우는 몹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며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를 연기한다. 그러나 이렇게 뻔한 스토리를 희화화하고 비웃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널리 양산되는 이야기의 본질을 깨닫는다. 타인을 하나의 개인이 아닌 환자라는 선결적 맥락 위에 놓은 채, 멋대로 재단하고 억지로 몰아가서 마침내 도달하는 소위 ‘해피엔딩’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해피엔딩이며 무엇을 위한 해피엔딩인가? 그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팔자 좋은 해피엔딩 속에서 도대체 누가 ‘해피’ 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의식은 극의 창작자인 X가 가면을 쓴 채 직접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고조된다. 그는 자신의 창작물을 우습게 곡해하는 친구들을 밀어내며 얼굴을 가린 채 무대 위에 선다. 탈에 의지해 속마음을 털어내는 그에게 세상은 무관심하다. 점차 조명이 꺼진다. 그는 가지 말라고, 조명을 끄지 말라고 소리치지만 꺼진 조명이 다시 켜지는 일은 없다. 어두워진 무대 위에서 그는 자신의 각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아무런 결말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는 자조적으로, 그럼에도 자신은 계속 이런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도 괜찮은 걸까? X의 자조 섞인 푸념을 그냥 푸념으로만 받아들이면 그걸로 괜찮은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말한 것처럼 때로는 어떤 말보다 많은 의미를 담는 침묵이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자조는 어떠한 논설보다, 심지어는 그의 자조에 덧붙이는 나의 각주조차 하찮게 만드는 무게가 있다. 그는 그토록 사람과 마주하는 걸 힘들어 했으면서, 왜 굳이 노력하면서 무대 위에 섰을까? 애초에 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극을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앞서 강조했던 내용을 한 번 더 들여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X에게는 증상만 드러날 뿐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침묵을 통해 극은 관객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어떤 단점은 고쳐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닥터 프로스트’라는 웹툰에 나온 문장이다. X는 자신의 모습이 단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모습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답답한 모습이며,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까지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 역시 받아들인다. 그것 또한 자신이기 때문에 단점은 치료되어야 하는 질병이 아니라 하나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다. 그렇다고 X를 마치 혁명가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맞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정당한 존중을 요구한다. 자신이 세상을 존중하는 바로 그만큼의 존중을 말이다.  

    

  여전히 우리의 곁에는 수많은 심해어들이 있다. 그들은 심해에 살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시각기관이 불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수면의 잣대를 그들에게 들이밀며, 그들을 장님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심연 너머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작은 속삭임을 응원한다. 덧붙여서, 너무 좋은 공연을 보여준 한예종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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