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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Dec 13. 2022

죄와 벌, 의와 복, 그리고 사명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고찰

  성서는 인류 문명의 거대한 축이며 이는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있어 성경의 권위는 단순히 그런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중요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성도에게 있어 성경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그 외의 무엇을 성경과 동격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 집단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이단으로 규정될 것이다. 물론,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 현상을 직관하고자 하는 철학의 관점에서 이미 정답을 정해놓은 채 다만 해석의 문제일 뿐인 신학은 다소 비 논리적이고 편협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떠한 문서가 그토록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는 적어도 이 글에서 다룰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것은 그저 믿음의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나의 삶 속에서도 성경은 언제나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인 비 신자들의 시각에서 매우 낯선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도가 성경을 대하고 해석하는 태도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사실과 체계가 충돌할 때 무너져야 하는 것은 체계이지 사실이 아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언제나 최고의 권위는 사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적인 입장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성경과 체계가 충돌할 때 무너져야 하는 것은 체계이지 성경이 아니다. 이 말은 분명 옳지만, 오해의 여지가 많다. 단적인 예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한다고 해서 고대 근동의 율법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는가? 이는 옳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성경이라는 문헌이 가지는 의미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축자적인 의미에 집중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이들의 해석 방식이 크게 네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를 파르데스라 하는데, 페샤트, 레메즈, 다라쉬, 소드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페샤트는 축자적인 의미, 레메즈는 상징적인 의미, 다라쉬는 보다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의미, 소드는 신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뭔지 모르니까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며 하나님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보고 “아 하나님은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축자적인 의미의 페샤트에서 멈춘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산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일상과 구별된, 성스러운 어딘가로 지정된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상징적 의미인 레메즈를 파악한다면, 축자적인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상징하는 바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 내용을 다른 성경 전체와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로서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거신다는 것에 주목하여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 “네 고향 본토 친척 너의 아비 집을 떠나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 요셉이 느닷없이 꿈을 꾸는 장면, 요나가 갑자기 니느웨로 보내심을 받는 장면, 마침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까지 성경 전체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깊이 파고든다는 다라쉬의 단계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연속성이 오늘날 나의 삶까지 연결되어 이 순간 나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체험하는 단계가 바로 소드의 단계이다. 여기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성경을 읽었다 말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니 완전한 이해는 없고 다만 어제보다 나은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 단계는 분명 모두 중요하지만, 내 생각에는 기능이 다소 다르다. 뒤쪽으로 갈수록 진정한 의미에서 신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곧잘 한계를 모르고 날뛰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고정된 텍스트인 페샤트, 축자적인 의미로 돌아와야 한다.      


  성경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자세하게 하는 이유는 이것을 모를 경우 여러 신학적인 논쟁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 자기들이 맞다고 우기면서 세력이 크면 이기는 것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어떤 해석이 문제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 해석이 적절한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 의미의 복잡성을 갖지만, 해석의 자의성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 하자. 이번 글의 중심주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벌에 대해서이다. 사실 성경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오만가지 것들을 다 말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뭐 하나 설명을 시작하면 관련된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하는 게 나의 특징이다 보니 이 글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복잡해질 예정이다. 부디 잘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먼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죄는 ‘하타’라 한다. 이는 ‘궤도를 벗어났다’라는 의미이다. 참고로 경전인 ‘토라’는 ‘화살이 과녁으로 나아가는 길’을 의미한다. 즉 죄라 함은 벗어남이다. 이에 대해서는 처음 죄가 들어온 이야기인 선악과 사건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이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의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고 있다가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두려워하여 숨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곧장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사실 축자적인 의미로만 생각해보면 웃긴 이야기다. 튀어봤자 에덴 동산 안에 있을 텐데,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이 고작 나무 뒤에 숨은 것을 몰라서 어디 있냐고 찾다니 말이다. 이래서 축자적인 이해에서 멈추는 것은 위험하다. 죄의 의미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남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하나님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짧게만 요약하겠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던 것과는 달리 살려서 내보내시고 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한다. 축자적으로만 보자면 이건 그냥 하나님이 엄포를 놓은 것 같지만, 심층적인 의미를 파악하면 그렇지 않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영적인 죽음을 상징한다. 이 단절은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란 정의상 벗어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은 적어도 선악과 사건에서는 이상한 말이다. 죄는 정의상 그 자체로 죽음이다.      


  사실 죄를 벗어남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비단 기독교만의 특징은 아니다. 오히려 원시종교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설명이다. 가장 기독교랑 안 어울리는 유교만 봐도, 그릇된 행위는 천지지성을 벗어나 기질지성을 발휘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따라서 수행의 과정은 기질지성을 다스려서 천지지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고대 삼한에는 ‘소도’라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었다고 한다. 참 희한한 것이, 허락 없이 이 곳을 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중죄인데, 죄인이 이 곳에 넘어가면 잡을 수가 없다. 죄 지어놓고 또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끌어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소도에 들어가는 것이 죄인 이유는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소도는 성스러운 영역인데, 그 안에 속세의 사람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영역에 들어가서 속세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속세의 권력은 성역의 사람을 심판할 수 없게 된다. 심판은 다시 속세의 영역으로 돌아온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죄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철저하게 임의적이다.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하는데, 사실 별 이유가 없다. 그냥 적당한 경계를 긋고, 무엇이 성스러운 것이며 무엇이 속세의 것인지를 구분한다면, 그리고 그 경계가 신적인 것이라고 모두에게 통용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레위기에 보면 다양한 의례 절차들이 등장한다. 뭐 발굽이 있는 짐승은 먹으면 안 되고, 되새김질하는 짐승도 먹으면 안 되는데, 둘 다면 먹을 수 있었나 그랬던 것 같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은 단지 그것이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을 먹고 먹지 않고는 사실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무엇을 먹고 먹지 않고는 다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였을 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이다. 그래서 욥은 이방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을 만났고, 갈렙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지만 믿음의 사람으로 불렸다. 나아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환상으로 베드로에게 “내가 정결하다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베드로가 무언가를 부정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율법이었다. 율법은 행위의 제한을 둔다. 그러나 절제된 행위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표현일 뿐, 실제로 내가 어떠한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계명에 대해 가르치실 때,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있겠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사람은 이미 살인한 자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은 율법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율법을 통해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끄는 마음이었다. 다시 말해,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여기까지 논의에서 나는 성경이 말하는 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와 무관하다. 그것은 어떠한 상태이며, 보다 엄밀하게는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이다. 나는 죄의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 집중하면 굳이 원죄와 같은 이론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론을 도입한 이유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의미가 다르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악한 행동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내가 착한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상태가 바뀔 리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상호적인 관계이며, 신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나는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죄와 대립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상태를 ‘의’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분을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두 가지 상태에 속한다. 바로 의와 죄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되기를 꺼려한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 말도 안 듣는데 뵈지도 않는 하나님 말을 어떻게 듣겠는가. 물론 이건 다소 수사적인 표현이다. 보다 신학적으로 접근하자면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나의 관점만 서술하고자 한다. 다른 관점들을 서술하자면 그것들에 대한 비판까지 겸해야 하는데, 그 비판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자유의지에 관한 이전의 글과 겹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형이 아닌 인간을 창조했다. 그는 인간의 나약함을 헤아리시며, 인간의 의지를 최대한으로 존중하신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후술할 것이다. 일단 넘어가자.)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당신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본상태는, 즉 자신의 거할 곳을 아직 선택하지 않은 상태는 의가 아닌 죄이다. 왜 반대의 경우는 안 될까?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의의 상태인데 스스로 선택해서 죄에 속하는 경우는 왜 안 되는 걸까?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론을 도입했을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성경적인 수사로 표현하자면, 사탄이 공중 권세를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표현이 다소 거북하다. 물론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멸시하는 기독교적 결정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탄’과 ‘공중권세’라는 문학적인 표현이 수많은 신비주의, 영지주의 계열 이단의 뿌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자 한다.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모든 종교는 반드시 성과 속을 구별한다. 성스러운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는 분명 무언가 다르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들에게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스스로를 다수와 구별하고 살아가는 삶은 틀림없이 쉽지 않은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런데 자발적인 결심은 다수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데에 필요하지, 소수를 떠나 다수를 따르는 데에 필요하지는 않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하는 것이 자발적인 결심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의에 속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결심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의를 선택할 가능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기 이전 사람들은 어떠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고 예수를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 있는 우리가 예수님 이후의 사람이며 그가 어떤 존재인지 대강은 알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라.” 빌립보서에 기록된 이 구절은 기독교의 교리들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제시한다. 1. 예수는 하나님이다. 2. 예수는 사람이 되었다. 3.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 구절들은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예수면 예수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이 둘이 같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에 대해 캐나다의 작가 윌리엄 폴 영은 상당히 인상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타자와 자신을 하나로 묶는 힘이다. 사랑 그 자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별개의 위격이지만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인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위의 인용한 요한서신의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의에 속하거나 죄의 속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암시를 품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는 의에 속한다. 그렇지 않은 자는 죄에 속한다. 이전에 논의한 내용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의 자발적인 결심이 있다면 그는 의에 속할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왜 신이면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왔는가? 바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의 상태에 있고,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관계가 싫어 떠났던 인간이었다.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A와 B 중 A를 더 사랑한다는 것은, A를 얻기 위해 B를 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랑의 표현은 희생을 수반한다. 그래서 하나님이었던 예수는 죽어야 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예표되어 있었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이다.     


  100세가 되어 아브라함은 신에게 약속받은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갑자기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이끌고 삼일을 걸어가서 한 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산의 마루에 제단을 쌓고 위에 아들을 결박한다. 칼을 들어 내리치려던 순간, 신이 다급히 외친다. 멈추라고. 그만하라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알았다고.      


  이상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괴물 같은 이야기이며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마 교회 유치부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너희도 이렇게 순종해야 한다고. 철저하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려서부터 반골기질이 있던 나는 내심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생각했었다. 중고등학생 때, 한창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단지 겉멋만 들었을 때에 나는 이것을 하나의 의무로서, 정언명령으로서 생각했고 신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정말로 꽉 막힌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작품 속에서 제안하는 해석은 철없던 시절의 나와는 다르다. 작품은 이것이 철저하게 ‘사랑이 한 일’이라고 한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외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 한 일인가? 사랑이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바치다’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면 바칠 수 없다. 하찮은 것을 바치는 것은 모순이다. 중요한 것은 바치는 절차나 형식 따위가 아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올바른 절차를 밟는다 해도 바치는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면 그 행위는 바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치기 위해서는, 버리지 않고 바치기 위해서는 바치는 그것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사랑의 첫 번째 의미가 나타난다. 사랑은 대상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어서, 상대방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면 바칠 수 없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바칠 수 없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며, 이것이 사랑의 불가해한 속성이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삭이었다. 그래서 오직 이삭만을 바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삭만큼은 바칠 수 없었다. 신이 그에게 이삭을 요구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긴 하겠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모순을 초월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동은 신에게 있어 사랑의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제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신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한다. 그러나 왜 시험하는가? 이 역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두렵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사랑이 나의 사랑에 비해 너무나도 작을까봐. 이런 일은 일상적이다. 사랑을 확인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자신이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랑의 시험에 있어서 약자는 시험받는 자가 아니라 시험하는 자이다. 그의 사랑은 이미 이행되었고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시험하는 자는 동시에 시험받는 자이다.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버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해방된 후에야 그는 자신의 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신은 아브라함을 사랑했고, 그래서 아브라함은 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했고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삭이야말로 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이런 모호한 삼단논법이 아니더라도, 이삭은 신이 스스로 약속한 아이였고 이삭 역시 신이 사랑하는 존재였다. 결국 신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여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신이 스스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이삭을 바치는 행위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사건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이삭이다. 이삭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이삭은 모든 과정을 이해했다. 이 모든 일이 결국 사랑이 한 일이며, 사랑으로 인해 자신은 죽어야 함을. 그래서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죽다 살아났을 때, 실제로 그는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그를 죽이려 했고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즉, 이 서사의 세 등장인물은 모두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쳤고, 이 과정에서 사랑은 완성되었다.      


  사랑은 결코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의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은 (이런 맥락에서)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해 있었다. 이 관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동의가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누누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믿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믿으면 끝이긴 한데, 이 때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가 나를 사랑하시며 그래서 몸소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와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것은 이 신적인 합일의 과정을 감히 완성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이어야 한다. 단언컨대, 진정한 의미에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일생을 뒤흔드는 필생의 각오여야 한다. 신학자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이후에는 그에 걸맞는 행동이 요구된다.” 이것은 사실 사도 야고보의 기록에 대한 주석일 뿐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좋은 예를 이미 예수님이 드셨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짐을 다 뺏기고 중상을 입었다. 이 때, 한 제사장이 이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제사장은 의례를 집전하기 전에 부정한 피가 닿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외면했다. 반면 평소 사이가 나쁘던 민족의 사람은 이 사람을 치료하고 방까지 잡아주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모순을 비판하며 이야기 속 제사장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며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하는데, 단지 그 뿐인 사람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믿음은 사랑의 완성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에서 예수와 같이 살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물론 디테일한 사례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의에 대해서, 그리고 의에 속하기 위해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논해 보았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의아한 부분이 있다. 죄에 있으면 뭐가 안 좋나? 의에 속하면 뭐가 좋을까? 흔히 1호선 전철에서 말하듯이 지옥 가고 천국 가는 차이인가? 아니면 뭐 예수 믿으면 돈 잘 버나? 이에 대해 파스칼의 도박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당신이 신을 안 믿는다면, 죽었을 때 신이 없으면 평타, 신이 있으면 폭망이다. 반면 신을 믿는다면, 신이 없으면 평타 신이 있으면 개이득이다. 그러니 통계적으로 신을 믿는 게 안 믿는 것보다 이득이다.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 진의가 심히 곡해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팡세의 등장인물은 끝까지 신을 믿지 않는다. 사실, 파스칼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을 믿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득이니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은 논리적으로 접근해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스칼은 머리를 사용한 이성적인 앎과 심장을 통한 앎을 구분하며 (직접 직관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직관이라고 본다.) 신에 대한 믿음은 바로 심장을 통한 앎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신을 믿을 때의 이득을 내가 백날 논리적으로 늘어놓아봤자 그건 공허한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논리를 포기해서는 철학강의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어려운 노릇이다. 뭐 그래도 츄라이 츄라이.  

   

  먼저 대립되는 두 상태에 뒤따르는 보응을 알 필요가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리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 때, 성경에서 죄의 의미가 중의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여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이다. 다른 하나는 악한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의미의 죄와 후자의 의미의 죄는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이따금 예외적인 상황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실수로, 혹은 마음이 연약하여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책망’ 하신다. 책망 받을만한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관계가 있으니 책망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얻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지, 곧바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뒤로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한 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크게 다쳤다. 어지간하면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이를 크게 혼낼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죽을 위기라면, 그런데도 아이를 혼낼까? 아닐 것이다. 그건 살려놓은 다음 문제다.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성경 본문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너무 목이 마르던 차에 한 물가를 발견했다. 그래서 신나게 달려갔더니 물이 소금물이라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 민족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물 위에 나뭇가지를 띄우니 물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의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 글을 쓰느라 생각나서 성경을 펴보니, 이 구절 밑에 대학교 1학년 시절의 내가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겨놓았다.     


  본문에서 ‘치료하는’ 이라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 우선 애굽사람들에게 내린 것은 질병이 아닌 것도 많았다. 그리고 그 저주는 애굽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치료하는’보다 ‘용서하는’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본문에서 백성들은 물을 ‘요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한다. 그런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벌’하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신다. 왜일까? 본문에서 나타난 죄는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곧 관계의 단절이다. 이것은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 아닌 일종의 ‘질병’이다. 고통이다. 그러므로 용서가 아닌 ‘치유’를 받아야 한다. 치유는 관계의 회복, 또 한 번의 합일의 경험이다. 합일의 경험은 소유가 아닌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이 백성의 요구대로 물을 주신 이유가 분명해진다. 하나는 ‘너희가 소유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내 안에 있으니 너희는 내 안에 존재하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 하나는 ‘너희가 이 물을 마셔 보아라. 그래도 너희의 갈급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참된 해갈은 소유가 아닌 존재에서 온다.’라는 것이리라. 본문의 구절은 경고의 의미보다는 방법론이다. 하나님과 합일하여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마 이 즈음 에리히 프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의미의 죄, 곧 사망에 대해서는 책망이나 징계가 아닌 치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치료가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후에 범하는 여러 악행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을 것이다. 이 경우 책망은 믿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말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책망은 자식을 훈육하는 부모와 같이 사랑의 표현이므로, 예수를 믿어 사랑의 구조를 완성한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갖추도록 가르치는 과정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의 경우는 다르다. 흔히 이런 경우 하나님이 징벌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그릇됨의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다고 말한다. 이는 당연하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진실로 선하고 좋은 일이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재물 등과 무관하게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죄(하나님과의 단절)는 (굳이 말하자면) 그 자체로 벌이며 사망이다.      


  그렇다면 의의 삯에 해당할 복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 시편 1편을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니 그의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구절의 전반부를 살펴보자. 복이 의의 삯이므로 복 있는 사람은 의인을 의미할 것인데, 의로운 사람은 죄인이 있는 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죄와 의의 대립적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증해 주는 것 같다. 이 구절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복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잘 된다는 뜻이다. 근데 뭐가 도대체 어떻게 잘 된다는 뜻일까? 취직이 되나? 연애가 되나? 시험에 붙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사실상 원시신앙에서 냉수 떠놓고 빌던 거랑 다를 바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이런 이야기와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애새끼가 좀 싸가지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형이란 작자들이 노예상에 팔아버려서 노예생활도 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오만가지 고생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창세기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것이 형통이란다. 이 내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결국 이야기에 끝에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떵떵거리고 사니까 형통하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도, 상식적이지도 않다. 이런 그릇된 생각이 많은 신자들 사이에 팽배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가 비상식적이라고 욕을 먹는 것이다. 나중에 장관자리 꿰차면 그 동안 겪은 여러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정말 예수의 현현처럼 살면서도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성경을 읽어낼 때는 이런 비상식적인 해석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성경은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상식적으로 그릇된 내용을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창세기 기자가 요셉의 형통을 말하는 부분은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가 아니라 감옥에 갇혀 있을 때라는 것이다. 즉, 분명히 창세기의 기자는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형통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라고 먼저 말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하셨다.”라고 기술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를 두고 그것을 ‘형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 자체다.     


  홍수와 방주로 유명한 노아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자. 성경은 노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즉, 성경은 일관되게 복, 의, 하나님과의 동행을 일련의 연결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태, 달리 말하자면 동행이었고 이것은 그 자체로 복이다. 복의 개념을 돈이나 명예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경우, 복에 대립되는 개념인 벌의 의미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복이 물질적인 부유함이라면, 벌은 가난, 장애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해석을 분명히 거부한다. 제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된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물을 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대답하신다. 가난이나 장애가 죄에 대한 벌이 아닌 것처럼, 부유함과 건강 역시 의에 대한 복이 아니다. 의와 복이 하나님과 동행함의 문제인 것처럼, 죄와 벌은 하나님과 멀어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가난이나 장애 같은 것들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면, 세상 살아갈 때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답변이 가능한데, 가장 많이 제시되는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 내세에 얻을 보상 같은 것들이다. 나 역시 이런 것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성경에 나와 있기는 하니까.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다 히브리 민족의 수사기법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기는 한다. 그러나 이런 답변은 대중을 설득하기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가 신앙의 근거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을 믿어야 된다. 근데 성경을 믿는다면 이미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부활에 대한 막연한 소망 등으로 신앙을 갖기 시작하는 사람이 많지만, 논리적으로는 순환논변의 오류이다. 또 의당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이 순간 이 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생각을 해야지 죽은 뒤 내세를 기다리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도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이유로 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성경적인 오류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예수를 믿으면 좋은 점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점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지만, 굉장히 여러 내용이 뭉뚱그려졌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다. 물론 나의 삶에 굴곡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삶의 굴곡 앞에서 의연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하듯이,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시고 또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고난이 진정으로 고난인 이유는 고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목도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시길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세상과 격리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빶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주체로서 세상 속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라면, 삶의 의미의 변화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정말로 거대한 주제이며 성경 전체를 또 한 번 관통하며 살펴야 하는 내용이다. 뭐 하는 데까지만 해보자. 예수가 수제자 베드로를 부를 때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자.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본래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였다. 어느 날 더럽게 고기가 안 잡히던 날이었다. 예수가 나타나 그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이는 베드로가 보기에 비상식적인 이야기였다. 갈릴리 바다는 깊은 데서 고기가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도 베드로는 따랐다. 그랬더니 어마어마한 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이상한 말을 한다. 바로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이다. 참 희한하지 않은가? 고기를 잡게 해줬으면 고맙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뜬금없이 자기가 죄인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이 고백을 들은 예수의 반응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너는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등장하는 상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성서에서 물은 죽음을,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세례를 받을 때 물을 바르는 것은 (사실은 물속에 잠겨야 한다. 근데 그러면 옷이 젖으니까)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던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을 ‘히브리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는데, 이 때 히브리는 물을 건넌 자라는 뜻이다. 즉, 가나안 사람들은 히브리인을 죽음을 극복한 자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사실 이 상징의 근원은 창세기 1장 2절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라고 기록된 상황을 잘 생각해보자. 온 세상이 물로, 곧 죽음으로 가득하다. 이 때 바람이 분다. 바로 성령이다. 실제로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본래 바람이라는 뜻이다. 천지에 가득한 죽음, 그리고 죽음을 몰아내는 바람에서 생명의 창조는 시작된다. 이것이 그대로 재현된 사건이 바로 홍해의 기적이다. 애굽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 민족 앞을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는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바람이 불어와 홍해를 가르고 마른 땅처럼 걸어 지나갔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그것이 갖는 상징이다. 물을 가르는 바람은 죽음을 극복하는 창조의 시작이며 이 구도가 그대로 세례 의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나아가 위의 베드로 사건과도 연결된다. 보다 정확히는, 위의 베드로 이야기는 물과 바람의 상징에 대해 보다 정확한 함의를 일깨워준다.      


  doc in altum! 깊은 곳으로 가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는 위의 상징을 생각하면 죽음을 마주하라는 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일까? 진짜 빠져 뒤지라는 말일까?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면 죽음은 더없이 개인적인 사건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본다. 그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죽음은 진정한 고독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doc in altum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서, 스스로 고독해지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살피며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생각한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나는 죄인이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고독의 시간을 거치면서 베드로가 자신에 대해 내린 판단이었다. 왜였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베드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더없이 낮아지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나를 떠나소서.”라고, 자신은 감히 예수를 마주할 수 없는 존재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이런 베드로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그것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이다. 지금까지는 고기를 물에서 건지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고독의 시간을 거치며 자신을 깨달은 그에게는 새로운 일이 준비되어 있다. 이제 그는 사람을 물에서, 곧 죽음에서 건지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깨달은 그에게, 곧 자유로워진 그에게 준비된 사명이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무력함과,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추악함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몸부림치면서 “나는 자격이 없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가 시작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 사랑의 결속이 이뤄진다. 그리고 이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사명을 알려준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한한 타자의 현현 앞에서 모든 수동성보다 더욱 수동적인 수동성이 그 사람의 주체성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명은 하나로 요약되자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베드로는 교부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이스라엘 민족 종교를 넘어 범지구적 종교로 발전할 발판을 세우는 사명을 받았다.      


  한 때 신학과를 갈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되게 사이비 같은데... 그냥 어떤 깨달음?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 그냥 물리학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물리학과에 왔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신학과 특유의 편협함으로부터 한 말 물러서서 개방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보다 열려 있고 유연한 사고를 통해 보다 현실에 알맞게 한국 기독교를 개혁할 사명이 있을...지도? 뭐 아님 말고.     


  쓰다 보니 글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져부렀다. 간단하게 요약하고 갈음하겠다.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 믿으면 잘 살고 안 믿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아주 유치한, 거의 원시 주술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죄와 의는 행위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지 여부로 결정되는 상태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음이 그 자체로 벌인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함이 그 자체로 복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을 때의 이점이 있다면, 저마다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삶에 부여하는 의미의 변화일 것이다. 예수를 만나고, 무한한 타자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치열하게 자각할 때, 그는 “나를 따르라”라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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