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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Apr 23. 2023

[현상학 탐구] 레비나스와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원래라면 사르트르가 등장해야 하겠지만, 걍 꼴리는대로 하기로 했다. 사실 레비나스가 더 먼저 활동을 시작했는데 왜 다들 사르트르부터 시작하는지 조금 의아하다. 물론 현상학의 흐름에 있어 소위 말하는 ‘정통’에 속하는 사람은 레비나스보다 사르트르다. 그리고 레비나스와 사르트르는 아무래도 대척점에 있었던 점, 그리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신학적인 성격이 강한 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해서 레비나스의 위상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아하고 또 애정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라서 먼저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또한 레비나스가 주로 비판하는 철학자가 후설과 하이데거라는 점에서 후설 뒤에 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이데거 뒤에 오면 더 좋았겠지만, 다룰 생각이 없...)     


레비나스의 사상은 정말 어렵다. 나 역시도 전문가는 아니다보니 애매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고 틀린 부분들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적을 것은 그저 내가 이해한 만큼일 뿐이다. 혹여 뭔가 쎄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먼저 후설 복습부터 시작하자. 이미 말한 것처럼, 현상학이라 함은 세계 일반에 대한 나의 태도를 괄호 안에 넣고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끝에 마침내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기술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 끝에 후설은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코기토를 정초할 수 있었다. 후설의 코기토는 지향적 구성능력을 가진 주체였다. 대상으로서의 무엇을 지향하고, 그 무엇이 마침내 대상일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진 주체로서의 코기토가 모든 경험적 세계 이전에,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했다. 레비나스는 후설의 이러한 인식론적 구도가 완전하고 엄밀한 의미의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후설의 인식론적 현상학의 구도 속에서 모든 대상은 결국 나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후설에 대한 글에서 나는 의식의 지향성을 통해 세계의 대상들이 점차 드러남에 따라 현상학이 존재론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음을 설명했었다.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세계 전체가 결국 나에게 드러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비단 후설만의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깝게는 하이데거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따로 글을 쓰지도 않을 테니 여기에 약술해 보자. 하이데거의 철학을 관통하는 명제는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일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다시 말해 ‘존재하다’로서 사용된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의 차원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존재자로 정초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가리켜 ‘던져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무엇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존재로서의 세계 위에 존재자로서 정초하기 때문이다. 존재자가 된 인간은 존재에 경계를 그음으로써 그것을 대상이 되게 한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사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일찌감치 감지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의 자기정립은 존재의 열등함을 전제하고 있다. 열등한 존재의 상태를 벗어나서 보다 우월하고, 보다 이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자기정립. 나아가 인간을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 불안정한 존재로서 규정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을 염려하는 존재로 규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존재로서의 외부세계는 존재자인 나의 존재성을 채우기 위한, 다시 말해 나의 불안을 견디기 위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 독일 특유에 유아론까지 접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조금만 생각해보자. 세계는 도구이다. 나는 주체이다. 세계는 나 이외의 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타인을 도구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이렇게 하이데거의 사상은 나치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하이데거 자신 역시도 나치 당원으로 활동한다. 단 자하비가 비판한 것처럼, “실존주의자로 오해를 받아 고평가된 인물”이다.      


요약하자면,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그 이전 서양 철학 전통 전체에서 세계는 잠재적으로 나에게 이해될 존재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타인은 곧 다른 나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결국은 나와 동등한 존재,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 마음속에 매우 뿌리 깊은 생각이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생각해보자. 이 사자성어는 타인과 나의 지위가 동등하다는 전제 하에 둘의 위치를 뒤바꿈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도 없으리라는 것. 세계는 결국 나의 세계라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존재론적 일원론”이다.      


레비나스는 전혀 다르게 주장한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 가진 최종적인 편견이었으므로, 이 편견을 뒤엎은 레비나스의 주장은 후설보다 궁극적으로 현상학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아가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자이며, 어떤 의미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된 것이 타자이다. 나의 이해 범위가 유한하므로, 불가해한 타자는 무한하다. 타자는 무한하기에 나는 결코 타자를 벗어날 수 없다. 언젠가 타자는 내게 찾아온다. 이제 나 이외의 세계는 크게 둘로, 타자와 타자가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레비나스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구도를 따른다. 우선 존재(Il y a : 불어로 영어의 there is 에 대응함) 가 있다. 그리고 존재자(hypostase)가 있다. 이 구도에서 하이데거와 다른 것은 존재자가 (아직은)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자는 늘 불안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쉽게 말해 일하기 위해 밥을 먹는다. 반면에 레비나스의 존재자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맛있으니까 밥을 먹는다. hypostase에게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며, 모든 순간의 즐거움이 삶의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을 향유(jouissance)라고 한다. 향유는 레비나스의 존재자가 존재와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존재를 초월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타자와의 만남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죽음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그러나 결국은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인간은 존재를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은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지속되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작용하고 무언가 해낼 수 있는 것은 현재 속에서이다. 죽음 이후에는 현재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타자가 필요하다. 타자의 대표적인 예시로서 우치다 타츠루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바로 스승과 책이다. 이하에서는 그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도록 하자.      


우선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주목하자. 스승은 제자에게 ‘지(知)의 대양’이다. 이것은 지의 양적인 의미일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끊임없이 퇴보할 것이다. 스승이 정말 대양과 같은 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로서 제자에게 상정되는 것이 스승이다. 즉, 스승은 ‘알고 있다고 상정된 사람’이며 제자는 이러한 전제를 ‘결연히 인수한 자’이다. 여기서 이미 설명한 레비나스의 타자 구도가 반복된다.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이기에 비로소 타자이다. 스승은 성장의 과정에서 최초로 만나는 타자이다. 사제관계는 정량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는 나의 이해를 초월한 지적 차원의 존재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정량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대화에 들어가는 능력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열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할 수 없다’, ‘모른다’고 호소하는 사람에게 그가 할 수 없는 무엇에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것을 열거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기 위해서는 조감적인 시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스승은 상상적으로 확보된 조감적 시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스승을 섬긴다는 의미이며 스승을 두려워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스승은 나의 이해를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두려운 존재이며, 무한한 타자이다. 이 때, 스승의 무한한 타자성은 나를 기점으로 성립한다. 왜냐하면 스승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이해를 초월한 자로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자는 스승에게 무엇을 배우는가. 위의 구도에서 존재자가 타자를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존재자는 타자의 무한성을 경험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가 배우는 첫 번째는 스승을 경외하고 스승의 신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며, 두 번째는 동일한 가르침에 대해 스승과 다른 주해를 말하는 일이다. 제자는 자신이 받은 가르침에서 자신의 유일무이성을 드러내야 하는 책무가 있다. 제자는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 책무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자는 그의 고유성을 통해 배움의 전통 속에 전무후무한 말을 하기 위해 호출된 존재이다. 제자들은 ‘완전한’ 텍스트가 더욱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자들이다. 이 때, 텍스트가 완전한 이유는 모든 것이 적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유되기 때문이다. 의미의 복잡성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만든다.      


의미의 복잡성에 대해 부연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은 해석의 자의성과는 다르다. 해석에는 엄연한 규칙이 존재한다. 주해의 규칙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얼굴을 맞댄 대화를 통해 전승된다. 주해자의 권위는 스승을 갖고, 스승에게 구전을 받고, 스승을 ‘완전한 스승’으로 간주하는 예법을 밟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곧 텍스트를 독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스승을 섬기는 것과 텍스트 독해가 무슨 상관일까? 스승을 섬기는 것은 곧 타자 안에서 무한을 찾아내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타자에 대한 이런 도약이 불가능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텍스트 안에서 무한을 발견하는 도약 역시 불가능하다. 텍스트 안의 무한성, 곧 의미의 복잡성이 레비나스가 지향하는 글쓰기이며 철학이다.     


의미의 복잡성에 대한 한 예로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생각해보자. “A는 충분히 A적인가?” 동일해 보이는 A 안에는 이미 실현된 것으로서의 현세적 A와 실현되어야 할 잠재적 A가 공존한다. 이 A 안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즉 모든 텍스트는 의미의 복잡성을 가진다. 모든 텍스트 속에는 의미하는 것과 의미할 수 있는 것이 공존한다. 이 때,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의미하는 것보다 항상 크다. 이를 ‘의미의 과잉’이라 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선후관계나 인과, 혹은 상하관계에 있지 않고 병존한다. 의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선택되어 의미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것이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권리상 선행하지만, 사실상 의미하는 것이 있은 후에야 퇴고를 통해 의미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나므로 후행하기도 한다. 따라서 둘은 같은 수준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의미의 과잉은 텍스트의 구체성의 수준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프로파일링의 진술분석이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독자의 구체성과 관련된다. 고정된 텍스트인 ‘의미하는 것’이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는 의미 생성의 장으로 변화하는 것은 고유성을 지닌 주해자가 살아있는 자신의 실존을 텍스트 안에 비틀어 넣듯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주해자의 이러한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이 곧 주해자의 자격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의미는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하나는 ‘말하기’의 형태이다. 이는 지금 말하고 있는 행위 자체의 역동적인 상이다. 이것은 확실한 실체가 없이 일회적인 사건이며 이를 통해 의미가 생성된다. 두 번째 는 ‘말해진 것’이다. ‘말하기’의 결과로 생겨난 이것은 보다 확실한 실체성을 갖는다.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말하기’이다. ‘말하기’란 이웃을 의미생성에 끌어들이면서 이웃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타자를 끌어들이면서 이루어지는 의미생성은 모든 대상화 작용에 선행하며, 따라서 말하기는 모든 대화의 조건이 되는 가장 근원적인 대화이다.      


그런데 타자를 끌어들이는 대화에도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메시지의 전달이다. 이미 머릿속에 사고내용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이 언어화되어 상대에게 건네지는 작용이다. 일상적인 대화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모습은 폭로로서의 대화이다. 이것은 대화의 시작이며 근원 중에서도 근원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네 인사 중 ‘안녕하세요’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인사는 상대가 나를 인식하기도 전에 상대에게 건네지는 축복이다. 상대에게 들리지 않거나 혹은 묵살될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행위이며, 곧 자신의 약점을 타인에게 먼저 폭로하는 행위이다. ‘폭로’는 레비나스의 윤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무한한 타자, 그렇기에 나의 노력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타자는 스스로 먼저 나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건넨다. 다시 말해, 폭로하고자 한다. 이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씹는 것이다. 타자의 폭로를 무시한 채, 존재를 초월하는 일을 연기한 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런 주체를 가리켜 레비나스는 오디세우스적 주체라 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타카로 돌아가는 그의 앞에 산재하는 여러 난관들은 종국에는 극복될 것들이다. 오디세우스적 주체는 끊임없이 자아를 확장하며 내가 아닌 것이었던 대상들을 흡수하여 나로 만든다. 이 주체의 세계는 이미 나인 것들과 언젠가 나이게 될 것들로 구분되므로 결국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여기에는 확장은 있지만 초월은 없다.     


반면에 타자의 폭로 앞에 그것을 환대하는 주체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주체를 가리켜 아브라함적 주체라 한다. 어느 날,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갑자기 찾아온 신의 음성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폭로한다. 그 음성은 “너의 고향 본토 친척 너의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분부한 곳으로 가라.”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철저하게 불가해하다. 이 소리는 느닷없이 찾아와 느닷없이 떠나라 하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래봤자 결국 목소리였을 뿐이다. 이 짧은 메시지는 이행되지 않을 때의 징벌같은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타자의 폭로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결단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절대적이고 무한한 타자로 상정하고 환대하는 일을 통해 아브라함적 주체는 자아의 확장이 아닌 존재의 초월을 경험한다. 결코 내가 아니며 결단코 내 안에 포섭될 수 없는 무한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자는 존재를 초월한다. 이 때,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나는 무한한 타자를 레비나스는 얼굴이라고 표현한다. 즉,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행동을 명령하며, 그 명령을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을 통해 존재자는 존재를 초월하여 아브라함적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환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끝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타자를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를 환대해야 하며, 이는 다시 말해 아브라함적 주체가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느닷없이 닥친 명령을 절대적인 나의 의무이자 책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학이 성립한다.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는 기존의 존재론적 편견에서는 궁극적인 윤리학이 등장할 수 없다. 모두가 동등하다면 왜 내가 먼저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적 주체는 다르다. 아브라함적 주체는 결코 자신과 타자가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타자는 무한한 존재이며, 내게 명령하는 존재이다. 보다 정확히는, 타자를 그러한 존재로서 상정하는 것이 아브라함적 주체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적 주체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는 자신의 것이 아닌 책무를 앞장서서 결연히 인수하는 자이다. 이는 어떠한 도덕적, 환경적 우월성에서 기인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잘났고 저들이 불쌍하니까 이 정도 사회적 도의는 다해야겠다는 발상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일 수 없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반대다. 모두가 죄인인 와중에 나는 특히 죄인이라는 고백으로부터, 즉 타자와 나 사이의 불평등을 결연히 인수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윤리학이 태동한다.      


개인적으로 레비나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이러한 윤리학적 고백이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성경에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적용해보도록 하겠다. 그의 윤리학이 상술한 것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책무를 인수하는 것이라면, 그 인수자가 아무 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결연히 인수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고 아브라함적인 주체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예수이다. 그의 행위가 진실로 선했던 이유는 자발적인 책임을 다함으로서 마침내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예수는 가장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 요나를 보자. 신은 요나에게 나타나 적국의 도시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고 명령한다. 다시 말해, 네 것이 아닌 책무를 짊어지라고 요구한다. 요나는 아브라함과 달리 도망친다. 그는 자신의 이성을 이용해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타자의 무한함을 목도하고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된다. 3일을 갇혀있으면서 요나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다. 그리고 기쁘지 않은 마음으로, 마지못해 니느웨 성읍을 대충 돌며 회개하라 전한다. 그러자 요나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게도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일이 벌어진다. 그는 무한한 타자의 얼굴을 보고 별 수 없이 명령을 따르기는 했지만 마음 한 켠은 변함없이 오디세우스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원망한다. 그러나 진실로 아브라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발적’인 책무를 요구한다. 신은 요나를 한 번 더 설득하고, 마침내 요나는 자신에게 신의 음성이 타자의 얼굴로 나타난 것과 같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성이 타자의 얼굴로 나타났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타자의 얼굴은 윤리적인 행동을 명령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전하는 것처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요나의 사례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무한한 타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의 음성 같은 신비적인 체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스승도 무한한 타자가 될 수 있고, 책도 그럴 수 있다. 무엇이 무한한 타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내가 그것을 무한한 타자로서 상정하고, 그로부터 절대적인 윤리적 책무를 결연히 인수하면 된다. 내게 그럴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온 세상에 신의 음성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한한 타자의 얼굴은 가장 작은 자의 얼굴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윤리적 행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의 얼굴로 내게 찾아와서 윤리적인 행동을 촉구하며 나는 그를 환대할지 무시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한 결정권한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타자로부터 폭로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사물이 아닌 존재자이자 주체이며, 환대를 통해 나는 아브라함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서양철학에서 제일철학으로 취급되던 존재론을 극복한 끝에 정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윤리학이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철학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난해하기 짝이 없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잘 못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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