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 있어 망원동에 갔다가 우연히 ‘카페창비’에 들른 적이 있다. 마침 카페 아래층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안녕달 작가의 신작 <당근유치원>의 출간을 기념하는 원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러 그림 사이에 작가의 다른 책도 몇 권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처음 보는 책이라 얼른 아이와 읽어 보았다. ‘읽는’것에만 집중했던 탓일까, 나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정겨운 그림과 조금 밋밋하고 심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책, 그것이 나와 <할머니의 여름휴가>의 첫 만남이었다.
할머니의 여름휴가 / 안녕달 / 창비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예전의 나는 무엇이 밋밋했던 걸까. 잔잔한 그림과 대비되는 굵직한 감정들이 수시로 올라와 자주 코끝이 시큰거렸다. 오래된 수영복과 우산을 챙겨 강아지 메리와 함께 넓고 푸른 바다에 닿은 할머니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책 속의 할머니 얼굴 위로 다른 얼굴이 겹쳐졌다. ‘할머니는 힘들어서 못 가신다니까’라는 문장을 읽는데 ‘겉은 이래도 속은 멀쩡하다’ 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서글퍼서 사진을 찍고 싶지 않다는 시어머니.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외출을 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자꾸만 저 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수영복을 입어본 때는 언제였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 중이다. 일 년에 몇 번씩 반복되는 일이다. 점점 약해지는 몸처럼 기억도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아버님과 함께 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만 품고 계신 것 같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면서 어머니의 여름휴가도 멈추었다.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어머니에게 ‘할머니는 힘들어서 못 가신다니까’하고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를 둘러싼 좋은 감정들 어딘가 슬쩍 끼어 있는 뾰족한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잘 지내다가도 가끔씩 어머니에게서 애먼 소리를 듣고 나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며칠씩 가슴앓이를 하기 때문이다. 덥고 습한 여름 동안 나는 또 얼마나 자주 시험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까. 하지만 책 속의 할머니를 보며 이번 여름엔 여전히 ‘속은 멀쩡한’ 어머니의 손을 쉽게 놓아 버리진 말자고 스스로를 달래 본다. 어머니에겐 또 잊힐 기억이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