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많은 따돌림 괴롭힘 등을 경험했지만 자잘한 일들은 무용담 삼아 자주 말하며 넘겼다.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때 상처를 자세하게 한 번도 거론해 본 적이 없다.
말하면서 그 시절을 되새기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였다.
말하다 말거나 아예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최근 이 이야기를 적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울증 치료 때 털어내고 비워내며 다시 나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작은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상처가 상처가 아닌 것이 된 것은 아니다. 그대로 상처다. 그럼에도 난 잘 자라났고 잘 살아가고 있다. 그 순간 지옥 같았음에도 버텨냈고, 다시 세상을 살아갔다. 다음세대에게 말해 주고 싶다. 상처에 매몰되지 말라고, 시간은 해결책은 아니지만, 도피처는 되어 주었다. 분명히 좋은 날이 오고 좋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는 걸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함으로 어린 시절의 나를 불러내 도닥여줄 생각이었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다 적지 못했다. 그 아픔을...
이제 그 아이를 다시 만난 19살의 그때로 돌아가 보겠다.
누구나 삐삐 하나씩 차고 다니던 그때.
고등 때 친구로부터 자신이 다니는 연합서클에 한 번 와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대학가요제를 준비한다던 꽤 유명한 노래 동아리였다. 그때까지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던 나는 흔쾌히 모 대학 주변에 자리 잡은 동아리 방에 들렸다. 낡은 계단을 통한 2층에 자리 잡은 동아리 방은 상당히 컸고, 지저분했으며,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의 재촉으로 못 이기는 척 들어선 가장 안쪽 넓은 방에 남학생 여학생들이 20명 정도 모여 있었다. 모두에 시선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부끄러워 시선을 돌리자
키보드에 앉아 반주를 하고 있던 A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단박에 알아봤다. 광화문 광장에 있어도 그애는 알아봤을 것이다. 어찌 그 얼굴을 잊겠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금 반가운 정도였다. 아니다. 아마 그런 척 연기를 했던 것 같다.
친구는 "아는 사이야?"라고 물었고, 나는 "어, 조금"이라고 대답했다.
이후 생각도 못했던 입부 전통이라는 노래 시험을 보았다. A의 반주에 맞추어 드라마 내일은 사랑 주제곡을 부르다 긴장해서인지 음정이 흔들렸다. 시험을 주도하던 남학생이 자연스럽게 음을 잡아주며 같이 불러주자 모인 인원들이 내 노래를 합창해 무사히 노래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동아리에 다니게 되었다. 신기한 이야기지만, 난 동아리방에서 그애와 마주치는 일이 적었다. 내가 가면 A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애의 이야기를 듣는 게 다였다. 나는 궁금했다. 그애가 날 기억하는지? 그 애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나를 괴롭힌 건지. 정말 내 사투리 때문인지. 뭐가 그리도 싫었던 건지. 그래서 동아리 전체 회식에서 자연스럽게 술과 함께 물어보리라 벼르고 있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진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그때의 선한 얼굴을 하고
"에이 우리가 같은 반이 된 적이 있다고 기억이 안 나"
나라는 존재를 아주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모진 말인지 알기나 한 걸까? 내 세상이 온통 무너지고 있었다.
사이다에 탄 소주(소텐) 때문일까. 세상이 울렁거렸고, 엄청 게워내고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 어깨에 기대 난 조금 울었다.
A는 키가 별로 자라지 않았고, 물론 난 많이 자랐다. 이제 내가 더 컸으니 그래서 그런 걸 거라 나는 애써 상황을 좋게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그 애는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기억하는 거라고는 한 명이 그 무렵 전학 왔다는 거 고작 그것만 기억난다고 했다. 어떤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다.
피해자만이 피해를 기억하고 상처로 새기고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기억력의 틈새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아이러니 한 현실. 그 현실에 나는 완전히 긁혀버렸다. 미꾸라지에게 소금을 뿌려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서클을 그만두는 것을 고민했다. 계속 A를 본다면 나쁜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내 안에 어둠을 보았다.
인과응보란 옛 글귀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봉황 같은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키보드 반주를 맡으며 동아리 홍보에 나가는 일이 잦았고, 예쁘장한 외모에 속아 불나방들이 그렇게 꼬였다. 서클은 그녀의 거미줄에 걸린 불쌍한 먹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원래도 남자가 우세했던 동아리 방은 1학년 남학생들로 득실득실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훤칠하게 잘 생긴 남학생이 A를 찾으며 동아리방에 등장했다. 로맨스 물처럼 그 둘은 몰래 사귀기 시작했고 이상한 방식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남학생이 내 남자 사람 친구였기 때문이다.
A는 더 많이 피해서 나는 거의 그녀를 보지 못했다. 웃겼다. 기억을 못 한다면서 왜 나를 피하지?
복수가 이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면 한 명은 이유 없이 상처받아야 하는데요. 어떤 분들은 저를 이해할 수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좋지 못한 관계니 깨도 괜찮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답답하다고 생각하시죠. 근데 지금 나이에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어린 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저는 가해자가 될 만한 배포가 없는 사람이죠.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그런 겁쟁이입니다. 우선은 시원할지 몰라도 전 그렇게 제 상처가 해결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런 선택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저는 제 속의 악을 끌어낸 그 애를 놓아버렸습니다. 한 때는 성공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난 너로 인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난 정말 잘 살고 있어. "
위 내용은 장소도 등장인물도 조금씩 다릅니다. 누군가를 유추하지 못하게 교묘하게 조금씩 각색했음을 밝힙니다. 복수를 위해 쓴 글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