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함에 저항하는 도시의 곡선

: 자연을 모방하는 미메시스(Mimesis)적 조경과 인간성의 회복

by AVA

서론


1.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에 대한 반발

2025년 환경조경대전의 주제이기도 했던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명제는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근대 건축의 핵심이었다. 장식의 거추장스러움을 걷어내고 기능과 효율성을 가장 먼저 따진 이 명제는 그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눈에 비친 도시는, 이 명제가 도시를 재미없고 따분하게 만든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였다.

2. 자본의 논리가 설계한 도시의 우울함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의 도시는 도시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를 통틀어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은 그의 저서 『더 인간적인 건축 HUMANISM』에서 현재의 도시가 인간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 세계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 수없이 많은 기업이 사회 위에 주주를 둔다. 수없이 많은 정치인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 위에 권력을 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도시가 삭막하고 우울한 인상을, 우리가 아닌 사업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말한 것처럼 정치인은 자신을 뽑아준 시민의 삶보다 권력 유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보는 도시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거대 자본의 사업성을 증명하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용적률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 빽빽하게 지은 고층 건물들을 볼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낀다. 특히나 주상복합 아파트들에서 이런 인상을 많이 받는다. 건축물들이 마치 내가 이 거대한 도시의 부속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앉을 곳이라곤 버스정류장뿐인 삭막한 도시 속에서 우리 인간은 소외감을 느낀다. 도시가 주는 이러한 우울한 인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3. ‘따분함’은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나는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최근 저서인 『더 인간적인 건축 HUMANISM』을 접하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는 현대 도시의 가장 큰 문제로 ‘따분함’을 지목한다. 조경을 공부하며 늘 아름다움이나 녹지율 같은 개념에만 집중했던 나에게, 따분함이 인간의 건강을 해친다는 그의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건 그가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 과거의 작품들과 설교들이 따분하다며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신경과학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복잡하고 변화가 있는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반면,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환경에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즉, 우리가 흔히 도시에서 보는 단조로운 유리 통창 건물이나 끝없이 직선으로 늘어선 아파트들의 향연은 단순히 재미없는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게 하는 물리적인 공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숲속을 걸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은 자연이 가진 무질서 속의 질서, 즉 프랙탈 구조가 뇌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모더니즘이 만든 따분한 도시는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정서적인 활력을 빼앗아 가고 있다.


4. 미메시스(Mimesis): 자연을 닮으려는 시도

그렇다면 이 따분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나는 그 해답이 우리가 콘크리트로 덮어버린 자연을 다시 도시로 불러오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건물 앞에 나무 몇 그루만 딸랑 심는 조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물이 자연의 유기적인 곡선을 닮고, 구조물 자체가 마치 대지의 흐름을 유지하는 형태를 띠는 적극적인 미메시스(모방)가 필요하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고 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나무줄기와 잎, 강물의 흐름, 산의 능선, 이외의 모든 자연적 환경들은 모두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자연의 부드러움의 곡선을 도시 공간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인 잃어버린 인간의 감각을 되살리는 치유의 행위가 될 수 있다.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은 건축과 조경의 경계를 허물며, 건축물이 조경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하고, 인공섬 자체가 거대한 공원이 되기도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5. 글을 시작하며: 따분하지 않은 공간을 찾아서

이 비평문에서는 따분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도시의 새로운 공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특히 자연을 모방한 미메시스적인 접근이 현대 도시가 잃어버린 정서적인 인간성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탐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철학을 살펴보고, 그의 대표작인 ‘리틀 아일랜드’, ‘아자부다이 힐스’, ‘노들섬 당선작’ 등의 사례를 분석해 볼 것이다. 조경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단순히 건축물과 조경이 섞였다는 것에 매혹되기보다는 그 공간이 도시의 맥락과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공간을 사람들이 어떻게 채워가는지를 비평해보고자 한다.



본론

Ⅰ. 도시의 그리드(Grid)에 균열을 내는 곡선: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

1. 리틀 아일랜드

도시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Line)'이다. 특히 근대 도시 계획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 맨해튼은 철저한 그리드(Grid)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효율적인 교통과 토지 구획을 위해 그어진 수많은 직선은 도시를 거대한 바둑판으로 만들었다. 이 질서 정연한 도시 조직의 끝자락, 허드슨 강가에 서면 전혀 다른 문법의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한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다.

리틀 아일랜드가 위치한 허드슨 강변은 단순한 물가가 아니라, 뉴욕의 역사가 가득한 공간이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 이전, 이곳은 레나페(Lenape) 부족이 사냥과 낚시를 하던 야영지 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거대한 여객선들의 관문 역할을 했는데, 특히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생존자들이 구조손 카르파티아호를 타고 온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후 1970~80년대에는 뉴욕 LGBTQ 커뮤니티가 차별을 피해 자유롭게 어울리던 문화적 해방장소이자 프라이드(Pride) 축제의 무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뉴욕을 강타하며 부두는 붕괴되었다. 리틀 아일랜드 프로젝트는 이 폐허 위에서 시작되었다. 입구에 남겨진 녹슨 강철 아치웨이는 과거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의 흔적으로, 헤더윅은 이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함으로써 장소가 가진 역사적 기억을 새로운 공원의 입구로 남겼다.

헤더윅 스튜디오가 이 프로젝트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의 구조물을 만든다가 아닌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디자인의 모티브가 과거 부두를 만들기 위해 박은 나무 기둥들 주변에 겨울철에 얼음 조각이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리틀아일랜드가 완공된 이후에도 이 강물에 박힌 낡은 나무 기둥들은 서식지의 이유로 남겨졌다.


리틀아일랜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헤더윅 스튜디오는 조경 설계사무소 MNLA와 협업하였다. 그들은 132개의 콘크리트 화분에 뉴욕의 기후를 견딜 수 있는 100여 종의 자생 수목과 식물을 식재했다. 특히 섬의 네 모서리가 서로 다른 높이와 방향을 가진다는 점을 이용해, 각기 다른 미기후를 조성했다. 바람이 강한 곳에는 내풍성 수종을, 햇빛이 잘 드는 곳에는 양지 식물을 배치함으로써 생물 다양성을 만들고, 인공 구조물 위에서도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구현해 냈다.


2. 장식이 아닌 구조로서의 미메시스(Mimesis)

리틀 아일랜드를 '미메시스적 조경'의 대표 사례로 꼽는 이유는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기존의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공지반 녹화는 평평한 콘크리트를 먼저 깔고, 그 위에 방수층을 덮은 뒤 흙을 성토하여 나무를 심는 적층의 방식을 따른다. 이 경우 구조는 숨겨져야 할 대상이고, 조경은 그 위를 덮는 포장재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헤더윅은 구조물 자체가 자연의 형상을 모방하는 방식을 택했다. 132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포트는 튤립의 꽃잎 같기도 하고, 버섯의 갓 같기도 한 유기적인 형태를 띤다. 이 포트들은 각각 다른 높이(해발 4.5m~18.9m)를 가지며 서로 연결되어 그 자체로 인공적인 지형을 형성한다.


여기서 건축과 조경의 경계는 무너진다. 기둥이 곧 화분이 되고, 화분이 곧 땅이 된다. 이것은 자연을 흉내 내어 장식하는 차원을 넘어, 구조적인 시스템 자체가 자연의 생장 원리를 따르는 진정한 의미의 '미메시스'다. 강 속에 박힌 파일에서부터 상부의 녹지까지 이어지는 힘의 흐름은 마치 나무의 뿌리에서 가지로 뻗어가는 생명력을 연상시킨다.


3. 예측 불가능한 시퀀스와 인간의 크기를 고려한 공간

이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함은 경험의 변화에 있다. 평지 위주의 일반적인 수변 공원과 달리, 리틀 아일랜드는 입체적인 지형 변화를 통해 방문객에게 다채로운 시퀀스(Sequence)를 제공한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허드슨강의 뷰와 마주하게 되고, 움푹 파인 중앙 광장에 들어서면 도심의 소음이 차단된 아늑한 위요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장치들은 거대한 마천루 사이에서 위축되었던 인간의 감각을 다시 깨운다.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나 오피스 빌딩 숲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과 예측 불가능성이 이곳에는 존재한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크기를 고려하여 설계된 곡선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의 부속품'이 아닌 '공간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4. 왜 지금 우리는 이 곡선에 열광하는가?

왜 우리는 막대한 자본과 공학적 난이도를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이런 형태를 만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효율성과 기능성만을 좇느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즉 '자연을 닮은 곡선'이 주는 심리적 위안과 '따분하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조경이 단순히 빈땅에 나무를 심는 행위가 아니라, 삭막한 도시 환경을 치유하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적극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격적인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낸 인물은 누구인가? 이제, 자신을 건축가가 아닌 '만드는 사람'이라 칭하며 자연에서 미메시스적인 영감을 받는 토마스 헤더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Ⅱ. 토마스 헤더윅

1. 생애

1970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적 감수성이 충만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음악가인 아버지와 보석 디자이너인 어머니, 그리고 섬유 디자이너인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면 위의 추상적인 선보다는 손으로 만져지는 구체적인 물성에 익숙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훗날 건축을 대할 때도 거대한 담론보다는 재료가 주는 촉감과 디테일에 집착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학업 궤적 또한 전통적인 건축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8년 웨스트민스터 킹스웨이 칼리지에서 조각, 패션, 섬유 등 다양한 3차원 디자인 분야를 전공했고, 이후 맨체스터 폴리테크닉과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에게 건물은 '사람이 들어가는 거대한 가구'이거나 '도시라는 갤러리에 놓인 공예품'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학 시절 용접, 목공, 사출 성형 등 재료를 직접 다루는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훗날 헤더윅 스튜디오가 보여주는 독창적인 형태와 구조적 실험의 기술적 토대가 된다.

2. 만드는 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

그런 헤더윅의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한다. 토마스 헤더윅은 1989년 1월 브라이튼 서점에서 학생 할인 중인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브라이튼에 가게 된건 서식스 대학교 공개 수업일에 맞춰 ‘3차원 디자인’ 강의를 들으러 갔기 때문이었다. 꼬마 시절부터 발명과 새로운 발상, 사물 디자인에 빠져 있던 그는 18살이 되는 해에, 런던 킹스웨이 프린스턴 칼리지에서 비텍BTEC 내셔널 미술·디자인 과정을 밟으며 드로잉과 회화, 조각, 패션, 섬유, 3차원 디자인을 공부 중이었다. 그 무렵 어쩌다가 들어간 학생회관 매장에서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집에 실린 카사 밀라 페이지를 보게 되었고 책을 산다. 그의 저서인 『더 인간적인 건축 HUMANISM』에서 생애 최고로 잘 쓴 6.99 파운드라고 할 정도로 그 책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카사 밀라의 사진을 보고 토마스 헤더윅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그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건물’이 가진 잠재력이었다. 브라이튼에서 그사건이 있기 전의 그의 세계는 언제나 부동의 상태였다. 옛 건물은 매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데 반해 새 건물은 신기할 정도로 무료하고 단조롭다고 언급한다. 건물은 그저 보이는 그대로, 그게 전부였는데 까사 밀라는 부동의 현실 가운데 어떤 균열을 열어젖혔고, 그 균열 속에서 그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았다.


토마스 헤더윅은 또한 그동안의 효율 중심적으로 지어진 세상에 반발하며 곡선을 추구하는 자신의 의견이 번번히 현실과 부딪힌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돈, 시간, 규제, 규칙, 정치 등 온갖 압력에 익숙하며 별안간에 모든 일을 ‘기각’시킬 수 있는 많은 인사들도 잘안다. 또 창조적 비전을 희석시키려는 끊없는 압력도 알고, 특별한 건물은 차치하고 그저 새 건물 하나를 세우기 마저 얼마나 고된지도 안다.” 라고 언급하며 현실에 반응하지만 매번 물러서지 않는다.


3. 따분함의 역설

헤더윅은 도시의 따분함을 역설한다. 그가 현대 도시의 문제를 따분함으로 규정하고 이에 저항한다고 해서, 그가 모더니즘의 미학이나 단순함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기이한 형태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환경에서 균형과 적절함을 강조한다. 그는 저서를 통해 따분함의 이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따분함은 언제 안 따분할까? 지금껏 말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시한 요점에 일일이 매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평평함이 매력적일 때도 있다. 밋밋함이 우아할 때도 있다. 직선이 흥미진진할 때도 있다. 반짝임이 미소 짓게 할 때도 있다. 단조로움이 황홀할 때도 있다. 익명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진지함이 알맞을 때도 있다.


따분함은 언제 따분할까? 올바른 맥락에서 올바른 의도와 함께라면 따분함의 기본 요소로도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가 한 건물이나 장소에 너무 많이 모이게 될 때 따분함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 과한 따분함이 한 공간을 자리할 때, 따분함은 해로워진다."


이 문단은 헤더윅의 따분함에 대한 그의 비평적 시각이 매우 섬세함을 보여준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떼 다비따시옹’을 비롯한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지금의 따분함을 가져왔다고 지적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인생 말기에 설계한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노트르담 뒤 오(Nortre-Dame du Haut)에 대해서는 “내 인생 최고의 건물이었다”고 찬사를 보낸다. 이 극명한 대비의 평가는 헤더윅이 재료의 단순함 그자체를 싫어하는게 아닌 영혼 없이 반복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니떼 다비따시옹이 효율성을 위해 인간을 규격화된 박스에 가두었다면, 노트르담 뒤 오(Nortre-Dame du Haut)는 빛과 곡선, 그리고 불규칙한 형태를 통해 잊혀진 인간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유기체였다.


결국 헤더윅이 말하는 ‘해로운 따분함’이란, 건축가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을 때, 도시가 효율성만을 중시하며 영혼 없이 반복될 때 발생하는 따분함을 의미한다. 그가 추구하는 미메시스적 곡선은 바로 이 따분한 도시 속에 다시 인간적인 이야기가 담긴 특별함으로 채우려는 시도인 것이다.

Ⅲ. 감각을 깨우는 공간들: 헤더윅의 작품 분석

앞서 살펴본 리틀 아일랜드와 같은 맥락으로 헤더윅은 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인프라가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줄 수 있는가?"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계적인 해답을 자연의 것들에서 모방을 통해 얻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프로젝트들을 건축적, 조경적 관점에서 분석해 본다.

1. 도심 속에 흐르는 녹색 계곡: 아자부다이 힐스 (Azabudai Hills)

모던 어반 빌리지 (Modern Urban Village) 2023년 도쿄에 문을 연 '아자부다이 힐스'는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저층부 상업 시설과 조경 공간을 지칭한다. 롯폰기 힐스와 같은 기존의 복합 개발이 거대한 포디움위에 타워를 꽂는 방식이었다면, 헤더윅은 거대한 파고라를 설치하고 그 위를 녹지로 덮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삭막한 도쿄 도심에 '현대적인 산골 마을'을 구현하고자 했다.


건축과 지형의 일체화 이곳에서 건축물은 땅과 분리되지 않는다. 건물은 지면에서부터 부드럽게 융기하여 언덕이 되고, 다시 계곡처럼 흐르며 지하 광장으로 연결된다. 700m에 달하는 이 녹지 축은 단순히 건물을 꾸미는 조경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입체적인 지형(Topography)이 된 결과다. 건물 외벽과 지붕에는 수많은 식재 포켓이 설치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건물의 색이 변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휴먼 스케일의 회복이다. 주변의 초고층 타워들이 위압감을 주는 반면, 헤더윅이 설계한 저층부는 곡선의 매스와 풍부한 녹지, 그리고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텍스처를 통해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낸다. 이는 고밀도 도시 개발이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는 '인간적인 안락함'을, 미메시스적 곡선과 입체 녹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 시도다.


2. 낡은 석탄 창고의 로맨틱한 키스: 콜 드롭스 야드 (Coal Drops Yard)

런던 킹스 크로스(King's Cross) 지역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인 '콜 드롭스 야드'는 1850년대 석탄을 저장하고 환적하던 두 개의 긴 빅토리아 시대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사례다. 보통의 도시 재생이 옛 건물의 외관만 남기고 내부는 현대적으로 뜯어고치거나, 혹은 박물관처럼 박제하는 방식에 그친다면, 헤더윅은 덧대었다.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멀리 떨어진 두 건물을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만들 것인가?"였다. 그는 기존 건물의 벽돌 텍스처와 박공지붕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붕을 마치 엿가락처럼 늘려 공중에서 만나게 하는 파격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이자 기술인 지붕인 '키싱 루프(Kissing Roofs)'이다. 양쪽의 두 건물의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올라 서로 맞닿는 이 지점은 구조적으로는 기존의 낡은 조적조 건물이 붕괴되지 않도록 독립적인 철골 프레임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며, 그 표면은 8만 개의 청석 슬레이트 기와로 마감되어 옛것과 새것의 이질감을 없앴다.


조경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이 '만남의 지점'인 키싱 루프는 단순한 연결 통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붕 아래 형성된 거대한 열린 공간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광장이 되어 다양한 이벤트와 마켓이 열리는 커뮤니티의 거점이 된다. 이는 죽어있던 산업 유산에 새로운 시도를 제시하고 "건축물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서사를 통해 도시의 '따분함'을 걷어낸 사례다. 직선의 창고 건물에 부여된 이 우아한 곡선은 과거의 유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기능을 완벽하게 수용하는 창의적 보존의 모범답안이다.


3. 공항, 자연을 품은 도시가 되다: 창이공항 제5터미널 (Changi Airport T5)

공항이라는 거대 공간에 헤더윅 스튜디오가 KPF와 협업하여 진행 중인 싱가포르 창이공항 제5터미널 프로젝트는 그의 철학이 거대 인프라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준다. 공항은 현대 건축에서 가장 기능적이고,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인 공간이 되기 쉽다. 거대한 스케일, 복잡한 동선, 획일적인 대기 공간은 이용객을 지치게 만든다.


헤더윅은 이 거대한 터미널을 하나의 도시(City)로 재정의한다. 그는 공항 내부에 싱가포르의 정체성인 '정원 도시(City in a Garden)'를 끌어들여, 단순히 비행기를 타기 위해 스쳐 가는 곳이 아니라 머물고 즐기는 공간을 제안한다.


바이오필릭 디자인(Biophilic Design)과 공간 경험 아직 구체적인 안이 모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전 작업들로 미루어 볼 때 T5는 실내 조경의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대한 지붕 아래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유입하고, 터미널 곳곳에 실제 숲과 같은 대규모 식재 공간을 조성하여 이용객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바이오필릭 디자인'이 핵심이 될 것이다. 이는 공항이라는 기계적인 공간에 인간적인 감성과 자연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인프라는 차갑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또 하나의 혁신이 될 것이다.


4. 소리의 풍경을 그리다: 노들섬 국제지명설계공모 (Soundscape)

한강의 흐름과 음악의 공명 서울시가 주최한 노들섬 국제공모에서 헤더윅이 제안한 '소리의 풍경(Soundscape)'은 특히 눈여겨볼 만한 프로젝트다. 노들섬은 한강 한가운데 고립된 섬이자, 과거 강변가요제 등의 음악적 역사를 지닌 곳이다. 헤더윅은 이러한 장소의 정체성에 주목했다.

그는 노들섬의 상부 구조물을 마치 소리의 파동(Wave)이나 한강의 물결을 시각화한 듯한 다양한 높낮이의 곡선으로 디자인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아자부다이 힐스나 리틀 아일랜드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산세를 닮은 부드러운 능선을 형성한다.


입체적 동선과 조망의 파노라마 그의 제안은 평면적인 공원 조성을 넘어선다. 공중 보행로와 다층적인 데크를 통해 방문객들은 다양한 높이에서 한강과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다. 기존의 노들섬이 접근성이 떨어지고 단조로운 평지 위주였다면, 헤더윅의 안은 지형을 입체적으로 조작하여 방문객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그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소리의 풍경(Soundscape)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세간에는 리틀아일랜드 복제품이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부감이 있는 실정이다. 또한 현재 시공을 시작하며 원래 디자인 되었던 유러한 곡선이 아닌 구조물의 하중을 생각하지 않아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꺼운 기둥들의 등장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도 이러한 도전적인 공간이 생기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Ⅳ. 경계의 소멸: 직선의 독재를 끝내는 곡선의 미메시스

1. 건축과 조경의 이분법을 넘어서

지금까지 살펴본 토마스 헤더윅의 작업들 (리틀아일랜드, 아자부다이 힐스, 배슬, 노들섬 국제공모 등)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경계의 소멸이다. 근대 모더니즘 이후 건축과 조경은 철저히 분업화된 영역이었다. 건축가가 콘크리트로 건물을 만들면, 조경가는 그 건축물 주변을 적절히 채우고 꾸미는 장식가의 역할에 불가했다. 그러나 해더윅은 건축과 조경 사이에 우선 순위를 두지 않는다. 그는 건축가이지만 자연을 모방하고 모방함에 있어 조경을 끌어들이는 일에 스스럼이 없다.


2. 시각 중심주의를 넘어 촉각적 경험으로

하지만 헤더윅의 미메시스적 접근은 과거의 것들을 무너뜨린다. 실제로 본 아자부다이 힐스는 어디까지가 건물이고 어디까지가 조경의 영역인지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건축물이 곧 조경이고, 조경이 건축이다. 리틀 아일랜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축의 구조물이 하나의 그릇이 되고, 그 안에 조경의 재료가 심기고 공원이 되었다. 그는 건축을 주된 요소로, 조경을 장식적인 요소로 두지 않고 이 둘을 섞는다. 심지어는 위치를 바꾼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는 가우디의 말은 헤더윅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다. 헤더윅이 구현하는 비정형의 곡선은 단순한 시각적 유희가 아니다. 그는 시각뿐만 아니라 텍스쳐까지 고려한다. 헤더윅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들-콜 드롭스 야드의 거친 벽돌, 베슬의 구리빛 강철, 텍스쳐가 살아있는 콘크리트-은 사람들의 촉각적 경험을 자극한다. 시각 중심주의를 넘어 촉각적인 다른 요소가 결합될 때, 도시는 비로소 따분함을 벗고 생명력을 얻는다. 이는 그가 주장하는 소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공간적 해법이라 할 수 있다.


3. 스펙타클(Spectacle)과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

물론 비평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헤더윅의 모든 프로젝트들이 비판의 성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조경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지속가능성과 공공성의 문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막대한 시공비와 유지관리 비용이 투입되었고 이는 진정한 의미의 생태적 조경인지, 아니면 그저 스펙타클한 공간에 불과한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리틀아일랜드의 천문학적인 공사비는 우리에게 심미적 가치와 공공성, 그린 젠트리피케이션 사이의 균형을 묻는다. 화려한 랜드마크가 들어서면서 주변 집값이 오르고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은 도시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헤더윅의 과감한 시도들이 효율성의 논리에 짓눌려 있는 도시 공간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왜 공공 시설물은 지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 한국의 도시를 만들어갈 우리 세대들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화두임에 틀림없다.


결론

1. 발로 뛰며 보는 헤더윅

나는 이 비평문을 쓰기 전,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한 공간들을 직접 두 발로 걸어볼 기회가 있었다. 작년 가을에 뉴욕의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의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올랐고, 하이라인을 걸으며 더 베슬(The Vessel)이 만드는 벌집 같은 계단을 볼 수 있었고, 올해 겨울엔 도쿄의 아자부다이 힐스(Azabudai Hills)에서 덩굴같이 생긴 건물의 콘크리트를 직접 만져보았다.


책이나 모니터 화면 속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들은 파격적인 형태 그 자체였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실체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리틀 아일랜드의 콘크리트 화분은 거칠지만 따뜻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허드슨강의 물결은 건축물의 곡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자부다이 힐스의 곡선형 매스는 위압적인 도심 속에서 마치 숨 쉴 틈을 주는 거대한 허파처럼 느껴졌다.


효율성을 위해 직선으로 재단된 도시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했다면, 헤더윅의 공간들은 방문객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여기에 앉아봐", "저기를 바라봐", "이 질감을 느껴봐". 나는 그 공간들 안에서 비로소 도시의 부속품이 아닌, 존중받는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되찾는 기분을 느꼈다. 텍스트로만 접했던 '미메시스'와 '휴머니즘'이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치유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2. 내적친밀감 100%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토마스 헤더윅이라는 인물에게 단순한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넘어선 묘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스스로를 ‘건축가’라는 권위적인 타이틀 대신 ‘만드는 사람(Maker)’으로 칭하는 그의 태도, 그리고 무미건조한 도시 관료주의와 자본의 논리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상상력을 관철해 내는 그의 투쟁 과정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조경학을 전공하며 스튜디오 설계를 진행할 때마다 나 역시 수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이 곡선은 시공이 어려워", "이런 식재는 관리가 힘들어", "그냥 직선으로 펴는 게 경제적이야". 실제로도 정원드림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상상력을 현실적인 이유로 상상력을 제어받는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헤더윅은 타협하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그 직업의 소명으로 파이터 기질을 가져야 하나 보다.


그의 작품들이 때로는 "지나친 스펙터클이다", "비용 낭비다"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나는 그의 팬으로서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왜 도시는 따분해야 하는가?"라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그 질문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기어이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미래의 조경가로서 닮고 싶은 롤모델이자 동료 의식을 느낀다.


3. 다시, 한국의 도시를 바라보며

다시 시선을 돌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한국의 도시를 바라본다.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오명 속에서 용적률 게임을 반복하고 있다. 한강변의 스카이라인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성냥갑 아파트들로 꽉 막혀 있고, 우리가 매일 걷는 가로수는 생명력을 잃은 채 간판을 가리지 않기 위해 가지치기를 당한다.

최근 논란과 기대 속에 진행 중인 '노들섬 사운드스케이프' 프로젝트는 한국 도시가 맞이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앞서 본론에서 언급했듯, 시공 과정에서의 구조적 변경이나 두꺼워진 기둥, 그리고 리틀 아일랜드의 복제품이라는 비판은 뼈아프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실패하더라도 과감한 곡선을 그려볼 용기가 필요하다. 효율성이라는 정답지에 갇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다소 거칠더라도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미메시스적 실험이 훨씬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4. 끝: 곡선을 그리는 마음으로

루이스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는 20세기를 풍미했지만, 21세기의 도시는 새로운 명제를 요구한다. 나는 그것이 "형태는 감정(Emotion)을 따른다" 혹은 "기능은 인간성(Humanism)을 따른다"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토마스 헤더윅이 보여준 미메시스적 조경은 단순히 자연의 겉모습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가진 불규칙함, 다양성, 그리고 생명력을 도시에 불어넣는 작업이다. 직선이 인간을 통제하고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한 선이라면, 곡선은 인간을 머물게 하고 서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포용의 선이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도면 위에 무의미한 직선을 긋는 기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흙을 만지고 재료를 탐구하는 ‘만드는 자'의 마음으로, 삭막한 콘크리트 위에 부드러운 곡선을 입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그 길이 자본의 논리와 부딪히고, 효율성의 벽에 가로막힐지라도, 헤더윅이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 공간은 인간적인가? 이 장소는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가?" 따분함에 저항하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그 길 위에, 나의 조경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꿈꾼다. 이것이 내가 헤더윅의 곡선을 통해 배운, 그리고 앞으로 그려나갈 나의 도시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