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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아 Feb 04. 2023

정리하기

하나씩, 한 걸음씩

창문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햇빛 덕분일까. 그간 정체를 숨겨왔던 책상 위 먼지들이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부각한다. 햇빛의 따사로움 인지 수북한 먼지들이 잇달아 책상의 빈 공간을 침범한다. 뒹굴고, 날아다니는 그들을 보니 괜스레 코를 한 번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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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물티슈를 들고 한 장을 뽑는다. 촉촉한 물티슈를 펼쳐 먼지의 발자국을 지워낸다. 침대 머리맡, 책장, 내친김에 모서리까지. 하나씩, 한 걸음씩 청소를 시작했다. 내친김에, 책꽂이에 꽂혀있던 수많은 책들을 빠르게 한 장씩 손으로 넘겨본다. 애정을 듬뿍 주었던 책표지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이런 책이 있었나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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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누에고치 같이 돌돌 말려있는 이불의 양 끝을 잡고 일직선으로 잡아당긴다. 침대 모서리에 처박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베개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점점 침대 본연의 구색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포근해진 침대를 보니 금방이라도 뛰어들어 그의 보드라움을 느끼고 싶었지만, 애써 정리한 게 흐트러질까, 눈 꼭 감고 유혹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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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유난히 거대하고 긴 책상은 정리함에 있어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가 차지하는 자리만큼 치우는 데 있어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영어공부를 하겠다며 굳은 다짐으로 구매했지만 반도 풀지 못한 문제집과 낙서 가득한 공책까지. 치울게 한가득이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오래된 다이어리가 잠시 나를 멈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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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빛바랜 살구색의 다이어리.

대학교 2학년 때 쓰던 기록장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배움에 대한 갈망과 학업에 대한 욕심들. 참 열심히 살았었구나 나.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의 글씨가 빼곡히 채워진 걸 보면서 책망만 가득했던 내 삶에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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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정리는 나의 조그마한 공간에 묵은 때를 벗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멈춰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과거의 흔적들을 슬쩍 훔쳐보면서 추억여행도 떠나보고 용기와 위안도 함께 얻었다. 특히, 다소 우울했던 21살의 나에게 누구보다 잘하고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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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다소 귀찮은 정리와 청소, 늘 반겨주진 못하겠지만 뒤죽박죽 된 뇌와 지친 눈을 헹구는 데 있어서 나만의 공간을 정리하는 게 의외로 다시 살아갈 원동력을 주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을 보니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쾌하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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