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수증기가 퍼진다. 바로 입으로 쑤셔 넣을 것 같지만 콧구멍으로 먼저 향을 맡는다. "그래, 이거지 콜라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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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가 입으로 들어온 순간 눈을 살짝 찌푸린다.
100캔 아니 300캔을 더 마신 콜라지만 첫 입은 늘 짜릿하고 새롭다. 혀에게 따가운 신고식을 마친 그는 식도를 타고 들어가 장기들에게 온몸으로 환영인사를 건넨다. "나 왔어, 콜라!!"
"크"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는 서서히 뿌예지며 눈물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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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를 유달리 좋아하는 나는 그와 언제부터 사랑의 서약을 맺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지만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콜라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도통 알 길이 없다. 콜라의 달달함? 그보다는 강렬한 빨간색과 탄산, 그리고 콜라의 냄새 때문이지 않을까. 한 박스 사다 놓은 콜라가 점점 없어져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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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야 너, 또 콜라 마시니?"
콜라의 폭주를 멈추는 말 한마디. 엄마다.
"까무잡잡, 깡마름, 날쌘돌이, 머스마, 천방지축"
이 다섯 단어로 어릴 적 내 모습을 대변할 수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밖에 나가 온 동네를 쑤시고 다녔으니, 두 다리는 상할 수밖에 없었고 날마다 상처가 늘었다. 딱쟁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뜯어내 피를 보고 다시 자라면 또 뜯고.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제발 손대지 말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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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밤마다 엄마에게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떼를 썼다. 양쪽 무릎이 너무 아파 오징어처럼 배배 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성장통이겠거니,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엄마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만 뜬 채로 조물조물 내 두 무릎을 만져주었다. 나중에는 엄마가 다리를 주물러줘야지만 잠에 이르는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그렇게 아팠던 성장통이었는데 지금 내 키가 153인 걸 보면 정말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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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다리 아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다리"라는 말만 꺼내도 예민해지는 엄마다. 골다공증이 걸린다며 엄한 말로 다그쳐보고 모든 아픔의 원인을 콜라로 돌리는 엄마의 원망은 내게 씨알도 안 먹히는 말들이었다. 째려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콜라를 마시는 나를 본 엄마는 속이 터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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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해외에 나가있었다. 애정표현에 서툰 모녀인지라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보고 싶다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우리다. 대신, 좋아하는 음식들을 기억해 차려주고 사주는 걸로 표현한다. 이에 눈 녹듯 사르르 풀리는 내 마음도 웃기지만.
먹고 싶은 거 없냐는 말에 딱히 없다고 둘러댔고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 보니 식탁에는 온통 딸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냉장고에 시원한 콜라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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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 콜라가 3개밖에 남지 않았다. 슬며시 설거지하고 있는 엄마에게 운을 띄워본다. "콜라가 얼마 안 남았네.." , "으이그, 그 몸에 안 좋은 콜라를 또 다 마셨냐!!" 한 손에 몰래 콜라를 쥐고 깨갱 하듯 방으로 도망쳤다. 소리가 새어나갈까, 손에 꽉 힘을 주고 콜라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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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장을 보는 날이다. 먹고 싶은 게 없냐며 물어보는 엄마에 슬며시 콜라얘기를 꺼내본다.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또 콜라를 마시냐며 질책을 주는 엄마였지만, 5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여기 펩시 밖에 없다며 네가 좋아하는 코카콜라가 없단다. 괜히 엄마를 힘들게 한 게 아닌가 눈치가 보였던 나는 괜찮다며 얼른 집에 오라고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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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무겁게 장을 보고 온 엄마의 장바구니 저 밑에 코카콜라 한 박스가 깔려있다. 마트 두 군데를 다녀왔나 보다. 그렇게 먹지 말라던 콜라였는데.
콜라의 사랑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