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마침표를 뒤로합니다
해남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땅끝 해남에 가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있다가 드디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땅 끝에 서면 어떤 서정이 일렁일 것만 같았습니다. 범인과 시인의 경계에 서서 쫓기듯 살던 일상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언저리에 서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던 어떤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땅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해남에는 대흥사가 있습니다.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잘 알려진 산사입니다. 땅 끝을 가기 전 이곳을 찾았습니다. 태백산맥이 국토 끝자락까지 이어지다 남해 바다 앞까지 이르러 마지막 결기로 우뚝 솟은 두륜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산사입니다. 계류가 맑게 흐르는 계곡길을 따라 걷는 길은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붉게 단장한 단풍나무가 장관을 이루며 가을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끝자락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산에 그윽한 산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흥사가 시작하는 곳에는 사리탑과 비석이 늘어선 곳이 나옵니다. 여러 절에 가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비석들은 오랜 세월 풍파를 맞아왔음을 금세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 공력을 들인 비석과 탑은 세월의 풍파를 견대내올수록 오히려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나무가 오래 살며 나이테를 새길 수록 그 아름다움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쌓아온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대흥사에 들어서서 사위를 둘러봅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둘러서 절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문득 부석사가 생각났습니다. 부석사에서는 저 멀리 아래로 산맥들이 연달아 달리는 시원한 눈 맛이 있다면 이곳은 저 위로 산등성이가 절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처럼 아늑히 느껴집니다. 우리 선조의 점지의 묘는 말 그대로 묘하고도 깊습니다.
내가 이 대흥사를 찾은 이유는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서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차를 좋아하던 추사가 초의선사와 나눈 우정도 좋지만 그가 쓴 현판 이야기는 나에게 울림을 줍니다. 학문적 성취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대단한 재능을 보인 추사는 젊은 날 청나라의 옹방강 같은 당대의 인사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젊은 날의 추사는 세상 두려울 것 없는 거침없는 엘리트 청년이었습니다. 50대에는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차관인 형조참판이 되어 청나라 외교 사절단 부단장이 되어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정변이 일어나 추사는 졸지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죽음만은 면하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제주도 귀향길에 들렀던 곳이 이곳 대흥사였습니다.
추사는 귀향길에서도 여전히 기고만장하였습니다. 당대의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대웅보전 현판으로 걸려 있었는데 그 현판을 보고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하며 극성을 부렸다고 합니다. 이에 초의는 하는 수 없이 원교의 현판을 떼고 추사의 글씨로 바꿔 달았다고 합니다. 귀향을 가는 신세였지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엘리트로 평생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제주도에서의 7년간의 유배 생활은 그런 그에게 쓰라린 시간이었습니다. 유배 중 부인을 떠나보내고 찾아오던 사람은 점점 발길을 끊게 됩니다. 날이 추워진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세한도도 이 시절에 나오게 됩니다. 7년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날에 외로움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지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정과 부귀영화가 끝나 버렸음을 끊임없이 되뇌었을 것입니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글씨를 또 쓰고 썼을 것입니다. 세상이 걸쳐 준 비단옷은 차츰 삭아버리고 바야흐로 그는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7년의 유배에서 풀리고 그는 다시 해남 대흥사를 찾게 됩니다.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추사는 지난번 잘못 보았다며 자신의 글씨를 떼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달아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릅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7년간의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통해 그 극적인 인간성의 변화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갇혀 지냄으로써 한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역설을 이루어냈습니다. 예술은 씨앗이고 인간성이 토양이니 그의 글씨 역시 새로운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 시절부터 추사는 말년까지 한국 서예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만들어 냅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오묘하게 법도를 담아내는 경지에 이릅니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담은 글씨 판전도 그렇게 탄생하게 됩니다. 인생의 그 많은 굴곡을 지나 그의 마지막 작품에 남아있는 낙관은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 였습니다. 나는 그 낙관에서 추사는 마침내 예술가로서 진정한 자유를 득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추사의 여운이 서린 대흥사를 뒤로하고 해남 땅끝전망대로 향했습니다. 가을의 저녁은 빨리 저물어 어느덧 어둠이 바다 위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습니다. 때마침 저무는 주홍색의 태양은 한줄기 빛을 수직으로 바다 위에 떨어뜨리고 있었고 파도를 타고 그 빛도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주홍 하늘 아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섬들의 실루엣이었습니다. 이곳에 서면 땅끝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상념에 잠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섬들을 보며 이곳이 땅끝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 땅 끝이라 불리는 곳에서 나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일몰은 이내 일출로 이어질 것이며 땅 끝은 바다로 그리고 저 섬들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 아래 땅의 끝과 시작은 어쩌면 한낱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표가 찍혔음이 글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마침표를 뒤로합니다. 이곳 해남 땅끝 마을도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어느 끝자락에서도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 끝과 마주치는 여정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또다시 어딘가로 향합니다. 살아있는 한, 삶의 나침반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치열하게 삶에 집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사도 노년에 이르러 그 지독한 끝자락을 마주하고 나서야 글씨의 완성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술혼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끝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상처는 치유의 시작입니다. 치유된 영혼은 더 단단해집니다. 끝나버린 사랑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쓰디쓴 실패의 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오직 어둠 속을 헤매는 순간입니다. 그 깨달음이 삶의 나머지 진실입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치 않는 그 끝에 서서 서릿바람을 맞아본 사람의 영혼만이 빛날 수 있습니다. 그 삶의 자락을 부여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그 끝은 시작을 위한 하나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