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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경 Sep 23. 2024

존재의 가벼움에 무게를 잡아주는 삶의 의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시읽기

니체의 영원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 조차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P9


밀란 쿤데라(1929~2023) 이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성공으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명이 됩니다. 생전에 이미 스타 작가가 된 그는 유명세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요. 사생활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인터뷰도 거부해가며 사적인 영역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이렇게 신비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요. 쿤데라는 이 작품 이외에도 <정체성>, <농담>, <무의미의 축제>등 유명한 작품들이 많은데요. 오늘은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고, 80년대에 이미 한차례 '프라하의 봄'(1989)으로 영화화된 바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제대로 읽어볼게요.

이 작품은 4명의 주인공의 서사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그리고 프란츠로 다소 철학적인?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작품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전개가 되는데요. 프라하의 봄이라 함은 당시 체코의 민주화 바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때문에 그해 여름 소련군이 체코에 침입해 무자비하게 짓밟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쿤데리 또한 프라하의 봄에 가담한 적이 있고, 이같은 활동 때문에 실제 체코에서 추방당하기도 했거든요. 작품을 읽는 동안 이러한 체코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정지척 활동이 핵심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니 참고하세요.


토마시는 프라하의 능력있고 잘 나가는 외과의사 입니다. 그의 취미는 여자들과의 가벼운 관계였구요. 어딜가나 주변에 여자들이 붙는 그런 매력 뿜뿜 캐릭터 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에 진료를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테레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순수한 시골 소녀로, 시골 생활의 무료함을 느끼던 차, 그들에게 작은 우연들이 반복되며 토마시를 처움 본 순간부터 묘한 끌림을 느꼈고, 토마시 역시 첫눈에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그는 프라하로 떠나야 했고, 작은 명함 하나를 남기죠. 그리고 며칠 뒤, 바로 그녀가 프라하에 있는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재회합니다.

토마시는 여자들과의 육체적 관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사랑과는 상관 없다는  철저히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생각은 그와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는 화가이자 친구인 사비나와 가장 잘 통하구요. 하지만 테레사는 원체 무거움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인물입니다. 토마시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복되는 작은 우연들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며칠 뒤 바로 토마시가 있는 프라하로 찾아옵니다.

<영화 프라하의 봄: 토마시와 테레자>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를 즐기지만 동침은 하지않던 토마시. 하지만 테레자가 찾아온뒤 그녀가 독감에 걸리자 자신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토마시는 테레자가 마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 나오는 강물에 떠내려온 아기를 떠올리고, 그렇게 테레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요.



"이번에도 여전히 테레자가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나에 담여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난폭한 강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니! 파라오의 딸이 어린 모세가 담긴 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 내지 않았다면 구약성서도 없었을테고, 그러면 우리 문명은 어찌 되었을까!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그 당시 토마스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P22


은유에서 생겨나는 삶의 무게

이 작품안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는데요. 시작은 니체의 영원 회귀설로 시작해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 그리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가 대표적 입니다. 이 글의 맨 처음에도 인용한 니체의 영원 회귀설은 '모든 것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 인데요. 반면 우리가 사는 삶에서의 모든 것들은 난생 처음 준비도 없이 닥치는 것들이잖아요. 첫 리허설이 인생 자체가 되는 우리네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책에서는 토마시를 통해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독일 속담도 소개합니다. 어찌보면 가볍기만 한 인생 자체에, 영원회귀설을 언급하며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특히 토마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있었어요. 테레자를 받아들일 때도 강물에 떠내려오는 아기를 생각했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역시 오이디푸스의 비유를 가져온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내린 결정들에는 번복하는 일이 없어요.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을 있습니다. 안나 역시 그래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끼고 다니며 작품과 비슷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있거든요.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2


토마시는 그녀가 사진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 사비나를 통해 신문사 일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또한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테레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토마시는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에게 강아지를 선물하기도 해요. 그녀는 강아지에게 안나 카레리나에 나오는 안나의 남편 이름인 카레닌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요. 

그리고 그 해 여름, 체코의 자유화 바람이 마음에 안들었던 소련군이 직접 탱크를 끌고 침략을 하는 일이 발생하고, 그들은 탄압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떠나기로 하죠. 


<영화 프라하의 봄>

사비나 역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제네바로 향하는데요. 사비나는 제네바에서 미남 대학교수 프란츠를 만납니다. 프란츠는 유부남이에요. 하지만 그는 아내와의 애정은 식을대로 식어 있었고, 말하자면 쇼윈도 부부 생활을 하고 있던차 사비나에게 제대로 빠져들게 됩니다. 프란츠는 최소한의 예의? 라고 생각하며아내가 있는 제네바에서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거부해요. 사비나와 함께 있기 위해 학회, 출장 등을 핑계로 둘러대며 여행을 하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비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아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히 고백하며 집을 나온 뒤, 짐을 싸서 사비나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비나의 눈빛은 차갑게 변해버리는데요. 그녀는 이러한 무거움과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그녀는 심각한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비나는 바로 파리로 떠나버립니다. 

<영화 프라하의 봄: 사비나와 프란츠>

제나바로 가서 토마시가 변하길 바랬던 테레자. 그는 그 곳에서도 역시 많은 여자들을 만나며 테레자를 실망시켜요. 그리고 그녀는 쪽지를 남기고 체코로 되돌아 옵니다. 토마시는 잠시의 자유를 느끼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뒤따라 체코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체코에서 토마시가 예전에 썼던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글이 화두가 되어, 그에게 그가 쓴 글을 철회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제출하도록 해요. 이 역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동침 했다는 것을 모르고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추후 알게 되었을때, 자신의 눈을 멀게 했듯, 공산주의자들 또한 모르고 했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거든요. 가벼운 연애를 즐기는 토마시. 당연히  적당히 자신의 주장을 절회하고 병원일을 계속할 것 같잖아요. 앞길이 창창한 외과 의사였지만 그는 탄원서를 쓰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 병원에서 쫓겨나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인생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반복 (모순적인 삶)

소설 속 네 명의 인물은 누구하나 무겁기만 하고 가볍기만 하지는 않아요.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고, 그 비율이 계속 바뀔 뿐이죠.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많은 것들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인생은 한없이 무겁거나 가볍기만 었고, 가지가 공존하면서 이루어지는 같아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무거움을 부정적인 짐으로 느끼며, 회피하게 되잖아요. 굳이 인생에서 무거움이 필요할까? 좋은 것만 보고 그냥 즐기면 될텐데.. 하지만 가벼움은 인생에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것을 있습니다. 가벼움은 위대함을 만들 수 없어요. 그렇게 쉽게 공허해지고 지속적으로 일탈을 찾게 되는 같아요.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벼려, 지강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P12


한편, 사비나에게 버림받은 프란츠는 사비나를 잊지 못하지만, 나이 어린 여대생과 동거를 하며 그럭저럭 일상을 되찾아 갑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권유로 캄보디아 국경 지대 대장정을 떠나게 됩니다. 프란츠는 그곳에서 지식인들의 허위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어린 연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게 되요.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럽게 강도를 만나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두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고 싶지만, 죽음 앞에서 그는 이혼을 거부한 부인에게 보내집니다. 그녀는 그가 마치 아내를 버린 죄책감에 캄보디아에 가서 죽었고, 그렇게 용서를 빌었다는 것처럼 장례를 치뤄줍니다. 이 작품에서는 키치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 상황이 제대로 키치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키치 이면의 세상도 우리의 일부

키치란 아름다움을 뒤집어쓴 가면, 허위로 가득판 세상을 의미 합니다. 세상과 인생의 어둡고 추한 것들을 가리고 그럴듯하게 아름다운 세상으로 보여지게 만드는 것들을 말이죠. 밀란 쿤데라는 이 키치라는 세계를 긍정하지는 않지만, 부정 하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키치라는 존재가 우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일 인지하고 그 이면의 것 또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에는 가려진 어둡고 무겁고 추한것들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무시한 채 살아갔을 경우, 그런 현실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지는 거에요. 이러한 양 극단간의 대립은 얼마든지 교체가능하고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거거든요.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서로 교체 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스탈린 아들 예시, 신의 아들이지만 어머니는 총살되는 예,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P397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싱 미이지에 호소한다. 배응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그리고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을을 흐르게 한다. ~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P411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P421


한편 토마시는 유리창 닦는 일을 하면서도 여자 관계는 끊이지 않아요. 탄압받은 지식인으로 소문이 났고, 유리창 닦는 일로 불러 대접받는 일들이 더 흔했죠. 견디다 못한 테레자는 시골행을 제안합니다. 그곳에서는 행복할 것 같거든요. (시골행 또한 안나 카레리나의 내용이기도 합니다.)그리고 그곳에서 토마시는 시골에서 트럭 운전사 일을 하게되고, 테레자는 그곳에서 행복을 찾아갑니다. 그러던 중 키우던 카레닌이 암에 걸려요. 테레자는 소중한 카레닌의 죽음을 통해 사랑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는데요. 

사실 카레닌은 키우는 강아지일 뿐이고, 존재 만으로도 위안을 얻잖아요. 강아지 한테 무엇을 바라며 사랑을 주지는 않아요. 자발적인 사랑인 거죠. 하지만 자신은 토마시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깨달아요. 어떻게 보면 계속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약자인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토마시를 계속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토마시에게 미안함과 진정한 사랑을 느끼며 토마시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파티에 가요.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간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P492


그녀는 그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항상 그를 바난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단순한 자만심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부당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토마시를 많이 사랑했다면 그와 함께 외국에 남아야 했다! 거기서라면 토마시는 해복했을 테고 새로운 인생이 열렸을 것이다. ~ 요정이 농부를 소용돌이 속에 끌어들여 빠뜨려 죽이듯 그녀는 그를 불러들여 더욱 낮은 곳으로 끌고갔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불렀고 결국 그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셈이다. 머리가 세고, 지치고, 외과의사의 메스를 다시는 쥘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굳어버린 토마시.

하느님 맙소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P511


그리고 그들은 파티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정비가 안된 브레이크탓에 비탈길로 떨어지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이다. 그런데 이상해요. 토마시와 테레자가 죽었는데, 비극이라는 느낌이 안들거든요. 오히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다가 맞은 죽음, 누구나 죽기 마련이고, 그들의 죽음은 씁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사비나는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가벼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토마시가 트리스탄(고전판 로미오와 줄리엣) 처럼 죽음을 맞아했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버렸던 프란츠가 생각나죠.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구요. 사비나는 잘 나가는 화가지만 인생의 가벼움만을 쫓아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했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등장 인물 4인방 중 가장 가볍게 살아온 사비나만 살아남았고, 그녀는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가벼울 수 있는 존재, 무겁게 잡아주는 삶의 의미

어찌보면 우리 삶 자체는 가볍다고 할 수도 있어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가벼운 탄생과 가벼운 죽음 사이에 존재를 하는 것이죠. 참을 수 없이 가볍기만 할 수 있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삶의 무게가, 키치 이면의 삶의 인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조리한 세상 안에서 주어진 당연한 삶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행복해지는 일. 그렇게 삶의 무게를 스스로 더해갈 때, 우리는 토마시와 테레자와 같이 행복한 삶을 누리다 가볍게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주곤 했다. 그러나 배반할 대상이 없어지면?..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묵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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