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양들의 침묵"
사회가 상정한 정상성은 폭력적이다. 사회는 정상성이라는 피상적인 규범을 설정하여 개인들이 이에 부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자신의 이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와 기득권층의 의도에 기인한다. 사회와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권 유지에 기여하는 정상성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상정하여 개인들을 통제하고 사회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자 한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개인들만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음으로써, ‘비정상적인’ 개인들은 도태된다. ‘비정상’적으로 규정되는 개인은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기득권층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인지되어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다양성은 소멸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소외된다. 더 나아가, 정상성은 법률과 같이 문자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하며 상대적이다. 즉, 정상성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개인은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검열하게 되고 자기평가의 기준이 타인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개인은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수동적인 개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정상성의 폭력성은 영화 《양들의 침묵》(Silence of the Lamb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성전환을 시도하는 동성애자를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묘사하고 동성애자와 여성들을 살해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동성애자인 버팔로 빌(Buffalo Bill)은 성전환을 시도하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부를 당하자, 여성들을 죽여 이들의 피부로 옷을 만들어 여성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FBI 훈련생인 클라리스 스탈링(Clarice Starling)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고 총살당한다. 또한, 빌과 성적 관계를 가졌던 벤자민 라스페일(Benjamin Raspail)은 살해당하여 머리가 잘린 채로 발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요 여성 인물인 클라리스는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빌의 살해 대상들은 모두 여성이다. 영화에서 성전환자, 동성애자, 여성은 모두 ‘비정상인’으로 간주되어 생존 가능성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비정상’인이 아니다. 이러한 전개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로 인지되는 동성애자와 여성들을 ‘비정상화’하고 이들에게 인간성과 생명이 부재하다는 판단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에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의 지위가 하등하였다는 것을 반영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현상을 적극적으로 문제시하지 않았다. 《양들의 침묵》은 대다수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성적 소수자를 정신 이상자로 치부한다. 영화는 이러한 무분별하고 무지한 영화적 관습에 대한 반성 없이 온전히 답습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는 이러한 관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신체적 체격과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대화하여 여성 인물을 폭력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이면적으로 기득권인 남성의 이권 도모를 위한 방법으로 기능한다. 대중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 사회적으로 우월하다는 논리를 각인시킴으로써 남성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허위적인‘남성성’은 원초적인 육체성으로 정의되어 이를 발현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대중매체인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성적, 폭력 대상으로만 기능함으로써 대중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고 여성을 남성의 하위자로 인지하게 된다. 오락의 용도인 영화를 보면서 대중은 무비판적으로 사건 전개와 인물 묘사를 수용한다. 이러한 영화의 속성으로 인해 대중은 영화가 주입하는 여성과 남성의 지위차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여성이 당하는 폭력을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여성의 상대적인 신체적 능력 부족은 이들이 당하는 폭력의 정당한 근거가 아니다. 여성이 폭력의 당연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이므로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의 성적, 폭력 대상으로 기능하도록 하여 ‘남성성’을 강조하였던 기존의 영화 관습을 철폐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영화는 여성을 무조건적으로 남성과 결부시키지 않고 여성만의 서사와 사건을 구성해야 한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적인 인물로 인지하지 않고 능동적, 주체적 인물로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동성애자와 성전환자를 정신 이상자로 치부한다. 이는 버팔로 빌이 자신을 치장하는 장면과 빌에 의해 납치당한 캐서린이 강아지로 그를 협박하는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빌이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착용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빌이 치장하는 신체 부분들인 입술, 목, 손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빌의 신체를 파편화하고 외모 치장을 하지 않는‘정상적’인 남성들과 다른 점을 부각한다. 동성애자이자 성전환을 지향하는 ‘비정상인’인 빌과 ‘정상인’인 이성애 남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이성애자가 기득권층인 사회의 정상성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성애와 시스젠더(Cisgender)는 지배적인 이념이다. 이러한 영향력은 사회 질서 유지에 기인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이성애는 아이를 낳아 사회와 가정의 노동력 증가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낮은 수준의 의학 기술로 인해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 구성원을 증가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이성애적 성관계를 통해 출산하고 노동 인구가 증가함으로써 사회가 안정되고 개인이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증폭하였다. 이처럼, 생존을 위해 이성애가 지배적인 규범으로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의학과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규범은 필요하지 않다. 이로 인해 이성애적 규범의 확립에 기여하였던 시스젠더도 절대성을 상실하였다. 지정성별과 자신이 지정한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는 이성애적 규범이 원활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기능하였다. 남자와 여자로 성별이 분리되고 개인이 지정성별에 이견을 갖지 않고 이에 부합하여 살아감에 따라 이성애가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인지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애가 도덕적이라는 근거는 전무하다. 이러한 규범은 오로지 원초적 생존에 일부 기여하는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개인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성별과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개인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은 자유를 침해하고 다양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개인으로 하여금‘정상적’인 이성애와 시스젠더에 부합하도록 종용하는 사회는 획일적이고 병폐가 팽배한 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에서 ‘여성’을 지향하는 인물인 빌은 카메라에 의해 신체가 파편화된다. 또한, 빌은 카메라를 향해 자신과 성관계를 맺고 싶냐는 대사를 하고 누드로 유혹적인 행동을 한다. 이는 빌이 성전환으로 여성이 되기를 지향하므로 ‘남성성’을 상실하고 ‘여성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에 기인한다. 빌은 본래 남성이지만 ‘여성’이 되기를 희망함으로써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박탈당하고 여성의 지위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메라가 남성의 시선으로 대변되어 빌을 성적 대상화한다. 한편, 빌도 카메라를 향해 자신과 성관계를 맺고 싶냐는 대사를 함으로써 자신을 성적 대상화한다. 이는 빌 역시 ‘여성성’을 잘못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영화와 빌이 정의하는 ‘여성성’은 남성의 성적 대상이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외모를 치장하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빌의 신체는 외모 치장을 한 목, 입술, 손만 중시되고 다른 부분은 제거된 상태로 파편화된다. 또한, 빌의 유의미한 대사는 남성과의 성관계를 바라는 대사이다. 이로 인해‘여성’으로서의 빌은 하나의 완전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고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부분으로 실재한다.
또한, 납치된 캐서린이 빌의 강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빌은 극도로 흥분하고 평정심을 잃는 모습을 보인다. 빌이 폭력적인 속성의 ‘남성성’을 강하게 발현하는 무자비한 살인마에서 애완동물에 대한 위협에 이성을 잃는 감성적인 속성의 ‘여성적인’ 개인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과 빌의 극히 낮은 목소리가 대조됨으로써 빌이 표상하는 ‘여성성’이 희화화된다. 본래 남성이었던 빌이 ‘여성성’을 지향함으로써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여성성’을 하등한 속성으로 인지한 것이고 시스젠더가 아닌 개인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정상인’으로 하여금 이들을 경계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영화는 여성과 동성애자, 성전환자를 ‘비정상인’으로 치부하여 사회의 안정과 질서에 기여하는‘정상성’의 관념을 유지하고자 한다.
한편, 영화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을 일부 비판하고 클라리스가 이러한 시선을 극복하도록 설정한다. 영화는 카메라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운동하고 있는 클라리스를 따라감으로써 시작된다. 카메라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많은 남자 중 혼자 여자인 클라리스에 주목하고 장례식에서 모두 남성인 경관들을 로우앵글로 찍음으로써 홀로 여성인 클라리스에 대한 이들의 위압감을 나타낸다. 또한, 조깅하는 클라리스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남성들을 보여준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은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칠턴 박사는 클라리스와의 첫 만남에서 매력적이라고 말하면서 같이 하룻밤 보내자고 유혹한다. 또한, 한니발 렉터(Hannibal Lecter)에게 미인계를 쓰는 것을 보니 크로포드 박사(Jack Crawford)가 똑똑하다고 말한다. 클라리스가 수사를 위해 곤충 박사들을 만난 장면에서도 이들 중 한명이 클라리스에게 수작을 건다. 이처럼 클라리스는 지속적으로 완전한 개인이 아닌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인지된다. 이러한 폭력적인 인식에 대해 영화는 비판한다. 클라리스는 자신을 업무적 대화에서 소외시킨 크로포드 박사가 그 이유를 설명하자 다른 경관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차별은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영화는 여성을 소외시키고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인지하는 남성적 시선의 문제점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과 동성애자, 성전환자를 ‘비정상인’으로 규정하는 정상성의 개념은 폭력적이다. 정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득권층과 사회가 자신의 이권 유지를 위해 상정한 정상성은 피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념이 만연한 사회에서 다양성은 소멸하고 개인의 독립성과 주체성은 박탈된다. 개인은 타인이 설정한 기준인 정상성이라는 관념에 매몰되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검열할 것이다. 사회와 기득권층의 이권 유지를 위해 오로지 하나의 인간상만을 설정하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에 부합하도록 종용하는 것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개인은 이러한 기득권층의 의도가 내포된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온전히 주체적인 자아상을 설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개인은 기득권층이 설정한 정상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