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계약

아버지의 손길이 결정하는 생과 사, 그 비정한 탄생의 의식

by 상식살이

들어 올려져야만 시작되는 생애


고대 로마에서 아이의 탄생은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가 사회 속에 받아들여져야 비로소 '로마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피임과 유산은 일상적이었으며 자유민의 자식이나 노예의 자식을 유기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였다.


진정한 의미의 자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아기를 손으로 '들어 올리는' 의식이 필수적이었다. 산파가 방 바닥에 내려놓은 아기를 아버지가 높이 쳐들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부양의 책임을 지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선택받지 못한 아기는 대문 앞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져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냉혹한 선택의 이면


모든 자식을 거두어 기르는 이집트인이나 유대인, 게르만인의 풍습을 로마인은 오히려 기이하게 여겼다. 로마 사회는 결함이 있는 아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형아는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버렸다.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 역시 가문의 수치로 여겨 유기했다.


비정한 선택의 기저에는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생존의 한계 때문에 아이를 버렸다. 중류층 이상의 가문은 자녀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고 재산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녀의 수를 제한했다. 자손의 품위와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로마식 가족 계획이었던 셈이다.


유기된 아이들의 엇갈린 운명


버려진 아이가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부유한 가문은 버린 자식이 다시 나타나 가문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다. 반면 가난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버린 부모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몰래 이웃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다.


비밀리에 길러진 아이들은 결국 길러준 이의 노예가 되는 길을 걸었다. 훗날 성인이 되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태생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며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친자 확인 절차조차 필요치 않았던 이들은 사회적·정치적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혈연보다 강한 가문의 질서


로마 사회는 순수한 혈통보다 가문이라는 조직의 연속성을 중시했다. 사생아는 철저히 배제되었으나 해방노예의 처지는 달랐다. 해방노예는 자신을 풀어준 주인의 성을 따랐으며 그 성은 자손에게 대물림되었다.


해방노예 중에는 막강한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속출했다. 이들의 자손이 기사 계급이나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수직 상승하는 일도 빈번했다. 명문가들은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과거 노예였던 이들의 자식을 가문의 구성원으로 적극 수용했다. 로마인의 탄생은 혈연이라는 본능을 넘어 가문이라는 정교한 사회적 체계 속으로 편입되는 치열한 정치적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