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만 명의 인구, 국경 없는 민족이 강대국의 전략 자산으로 전락한 이유
중동의 전운이 짙어질 때마다 국제 뉴스의 한복판에 소환되는 이름이 있다. 쿠르드족이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 쿠르드 세력을 이란과의 지상전에 투입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이라크 북부 민병대가 군사 장비를 대거 확충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군사 협력을 넘어선다. 강대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쿠르드족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징후다.
쿠르드족은 전 세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구는 약 3,000만에서 4,000만 명에 달하며, 단일 민족으로는 국가를 갖지 못한 최대 규모의 집단이다. 이들이 모여 사는 터전인 ‘쿠르디스탄’은 튀르키예 남동부, 이라크 북부, 이란 서부, 시리아 북부에 걸쳐 있다. 이 광활한 지역을 모두 합치면 튀르키예 국토 면적과 맞먹는다. 민족적 일체감은 강하지만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선이 이들을 네 갈래로 찢어놓았다.
쿠르드족의 독립 시도는 매번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좌절됐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할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쿠르드족에게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전쟁 중 오스만 제국과 싸워준 대가였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는 독립 가능성이 명시됐으나, 3년 뒤 체결된 로잔 조약에서 이 약속은 완전히 폐기됐다. 강대국들이 중동의 이권을 위해 튀르키예와 손을 잡으면서 쿠르드족의 꿈은 지도 밖으로 밀려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 소련의 지원 아래 이란 북부에 ‘마하바드 공화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냉전의 서막 속에서 소련의 전략이 바뀌자 지원은 곧 끊겼다. 이란 정부군이 진입하며 작은 국가는 1년 만에 무너졌고 지도자들은 처형됐다. 1970년대 이라크 북부의 자치 운동 역시 미국과 이란이 자신들의 전략적 우위를 위해 지원하다가,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가 개선되자마자 이들을 외면하며 비극적인 고립을 초래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쿠르드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순간 중 하나를 목격했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할라브자 지역에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집단 학살의 공포는 쿠르드 사회의 깊은 상처로 남았다.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이들은 미국의 협력자로 나서 정권 붕괴에 일조했다. 사담 후세인이 물러난 뒤에도 독립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튀르키예와 이란이 자국 내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를 자극할까 우려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2010년대 극단주의 무장 조직 IS와의 전쟁에서 쿠르드 전투원들은 서방의 ‘지상군’ 역할을 자처했다. 최전선에서 IS를 격퇴하며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관심은 싸늘하게 식었다. 2019년 미군이 시리아 북부에서 전격 철수하며 쿠르드족은 다시 한번 적대 세력인 튀르키예의 공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쿠르드족이 독립에 도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정학적 구조에 있다. 현재 튀르키예에 약 2,000만 명, 이란에 1,000만 명, 이라크와 시리아에 수백만 명이 분산 거주한다. 이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려면 기존 4개국이 영토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 이는 중동 전체의 국경 체계를 뒤흔드는 일이며, 그 어느 국가도 용납하지 않는 금기다.
중동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쿠르드족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가진 고도의 조직력과 군사력 때문이다. 이라크 북부 자치정부는 사실상 국가에 준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숙련된 민병대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지상전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이들의 군사력을 활용하려 한다.
쿠르드족 내부에서도 독립이라는 거대 담론과 현실적 자치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역사가 국제 정치의 비정함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중동 정세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쿠르드족은 여전히 누군가의 '카드'로 쓰이다 버려지는 위태로운 길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