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의 서막, 보이지 않는 공간 전쟁이 시작됐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풍경이 달라졌다. 오랜 시간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담벼락 아래 장기판이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오락 행위를 금지한다는 서늘한 안내문이 세워졌다. 갈 곳을 잃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인근의 실내 놀이터는 20평 남짓한 공간에 좌석은 30여 개뿐이다. 하루 수백 명이 몰려드는 탓에 아침마다 ‘오픈런’이 벌어진다.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차가운 바닥에 직접 들고 온 장기판을 펼친다.
한국은 이미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는 도시 공간을 둘러싼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은퇴 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에게 공원은 단순한 녹지가 아닌 유일한 사회적 거점이었다. 공원이 장시간 점유 공간으로 변질되자 소음과 음주, 도박 문제를 지적하는 민원이 빗발쳤다. 지자체가 단속의 칼을 빼 들면서 노인들은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지하상가와 지하철 역사다.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냉난방이 유지되는 지하 공간은 최고의 대안이었다. 인천 자유공원이나 대구 경상감영공원에서 밀려난 이들이 인근 지하상가로 모여들면서 상인들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 ‘장시간 체류’는 경기 침체에 허덕이는 상인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공원 관리 정책이 갈등을 해결하는 대신 다른 공간으로 밀어내는 ‘풍선 효과’를 낳은 셈이다.
최근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파크골프장은 세대 갈등의 또 다른 격전지다. 지자체들이 노년층 여가 지원을 명목으로 파크골프장을 우후죽순 늘리자 다른 세대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이 뛰어놀거나 가족들이 텐트를 치던 다목적 잔디광장이 특정 연령대만 이용할 수 있는 유료 시설로 바뀌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공공 자원인 도시 공간이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세대의 이해관계에 편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보다 앞서 늙어간 일본도 비슷한 진통을 겪었다. 공원 벤치 점유 문제와 공공시설 이용을 둘러싼 세대 간 마찰은 일본 도시 정책의 오랜 난제였다. 유럽의 선진 도시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령친화 도시’ 개념을 설계 단계부터 도입했다. 노인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를 도심 곳곳에 배치하고 모든 세대가 섞일 수 있는 복합형 광장을 조성해 공간 독점을 완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노인 정책은 의료 지원이나 소득 보전 같은 생존의 문제에 집중해 왔다. 사회적 외로움을 해소하고 시간을 보낼 ‘공간 복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상가와 지하도를 전전하는 풍경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공의 자리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초고령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머물 권리’다. 하루의 대부분을 집 밖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 친구를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는 생존만큼이나 절실하다. 공원을 무조건 통제하거나 특정 시설로 울타리를 치는 방식은 갈등의 유효기간만 늦출 뿐이다. 노인 전용 커뮤니티 공간을 현대화하고 실버 카페처럼 수익과 여가가 결합한 거점을 확대해야 한다. 전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 재설계가 시급하다.
도시는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거대한 유기체다. 인구 지도가 바뀌면 도시의 밑그림도 다시 그려야 한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작은 소란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거대한 공간 전쟁의 예고편이다. 노인의 자리가 지워진 도시는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가 사라진 도시와 같다. 함께 머무는 법을 고민하는 것이 초고령 사회를 맞이하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