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0)
앞으로 나는 2006년부터 2025년에 이르기까지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에세이, 일기, 정신과 치료일지, 상담 치료일지, 단상, 시, 타인과 주고 받은 편지 등 4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연재해나가려 한다. 그 과정 중에 가장 처음으로, 나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성찰적 글쓰기'의 한 챕터를 정리한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드라마'란 방송 TV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하다에서 유래되는 '드라마'라는 언어다. 극작가 김옥미로서 써내려간 성찰적 글쓰기가 앞으로의 글들에 지표가 되길 바란다.
1) 내면의 변화
드라마를 쓰는 과정에 있어서, 나는 ‘내면의 변화’를 지금껏 ‘단발적 선택’ 또는 ‘도피적 선택’으로 오인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그것을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단발적 선택’을 포장하는 구조였을 뿐 지금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써왔던 ‘내면의 변화’라는 것은 주로 ‘타인’에 의한 것이며(인물이 관계에 의해 움직인다는 정론과는 구별되는 의미의) 드라마로 포장되기 위한 ‘내면의 변화’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지금의 내가 재정립하려는 ‘내면의 변화’란 다음과 같다. 타인에 의해서든, 상황에 의해서든, 그 무엇에 의해서든, 결국 스스로 변화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불러 일으켜지는 변화가 ‘내면의 변화’라 생각한다. 말장난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앞으로 써나갈 ‘내면의 변화’란,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 또는 욕망을 자각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최선의 선택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사족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작품과 내 인생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건강한 주체에 대해 쓰고 싶다. 과정은 어떨지언정, 나 자신을 돌보는 올바른 선택을 해내는 인물을 그리고 싶다. 예술이라는 것이, 비극적 인물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인물과 삶을 지지하고 그런 모습을 통해서도 인간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게 되었다.
2) 드라마
드라마,를 써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기적과 극복에 대한 서사를 판타지로 믿어왔다고 생각한다. 극적인 낙차가 클수록, 드라마의 깊이가 갈리는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방법론적으로 그것이 틀린 작법은 아니겠지만, 나는 드라마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나락까지 치달았던 나의 고통이, 어떤 극한의 행복으로 언젠가 보상받지 않을까, 그런 식의 낙차로서 드라마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질문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 는 극적인 낙차로만 결정되지 않으며, 그것은 어쩌면 논리적인 방법론이지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작가적 태도는 아닐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결국, 정체성과 자아를 자각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선택이며, 그 선택 자체에 대한 유희나 쾌감보다도 그 선택에 의한 운명과 대단원을 감당하는 인물의 서사에 달려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지금까지 써온 드라마에서, 인물들은 어떤 극적인 선택 자체를 위해 도구적으로 쓰여지진 않았던가? 선택에서 비롯되는 유희와 쾌감, 절정감에만 주목하지 않았나?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타인과의 관계, 그 인물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 그 인물이 감당해내야 만 하는 선택의 결과들은 애써 나는 무책임하지 않았는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3) 주제의식
그리하여, 나는 드라마를 써오면서 나의 판타지를 합리화하고, 나의 후유증들을 재연하는 데 그치지 않았나, 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나치게 현시적인 화젯거리에 골몰하여, 어떻게든 당도한 문젯거리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섣불리 결론을 전시하진 않았던가, 싶어서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계성만이 희망으로 둔갑한 경우도 많았고, 집단(가족)이 인물의 전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물론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흔적들이 보여 문득 다시 주제의식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제의식이란, ‘지금’과 마주하되 섣불리 어제오늘내일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려 한다. 되도록 천천히 ‘지금’을 성찰하고 기록해두려는 수행 과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논리가 아니라 감성과 본능에서 기반하는 정직한 고백일테다. 나는 지금껏 사조나 논리나 구조에 의한 글쓰기를 하진 않았는가? 그리고 그런 글쓰기가 나의 여러 결론들을, 문젯거리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진 않았는가? 당분간은, 자전적 이야기를 멀리하고, 본질 자체에서 드러나는 주제를 찬찬히 바라다보고 싶다.
4) 확신의 기준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었다. 나의 확신(아집이나 고집이 아닌 선에서)들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지금에 와서는 생각한다. 신중하고 안전하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반항은 아니었을까, 하고. 평범한 것이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삶이었다. 내 삶이 대단히 거창했다는 자랑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평화가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런 과거가 확신 자체에 대한 원동력이 된 건 아니었을까 싶다. 확신에 대한 어떤 낭만화도 한몫 했을 것이다.
지금은 생각한다. 나는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 ‘확신’은 ‘충동’이 아니었다. ‘확신’이란, 대단히 신중한 언어다. 시간이 흐르는 과정과,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을 상상했을 때, 그럼에도 헤쳐나갈 수 있는 상호보완성이 있을 때, 의지나 결심이 아닌 구조적으로 목적과 본질이 부합할 때, 바로 그 때 ‘확신’이란 게 발생한다. 능동적인, 순발력 있는, 안목에서 비롯된, 여러 확신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나, 그런 확신에 나는 지금껏 도취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확신은 충동이나 도박으로만 정의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신중함과 책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5) 인간 관계와 사랑에 대한 책임
나의 습성은 확신적 태도 뿐 아니라, ‘올인’하려는 욕구에서도 기인한다. 사랑과 인간 관계에 대한 맹목적 찬양과 판타지가, 또는 어느정도의 자학적 매커니즘이, 평화를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삶이,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나를 사랑에, 관계에, 꿈에, 올인하도록 부추겼다.
물론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려던 내가 나에게 비극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를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구조가 발생하도록 했다. 모든 것을 걸고 나면, 나를 지지하고 있는 기반은 아슬아슬하게 울렁이며 나를 계속 흔들어댔다. 조금씩 자존감은 흐려지고, 온전히 나로서 설 수 없게 되고, 관계에 의존하게 되고, 다시 또 나의 무언가를 바득바득 꺼내어 올인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야 비로소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독립체로서 나의 인생을 설계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선행되었어야 한다. ‘나’를 제물로 건다는 것은, 결코 낭만이나 환상으로 포장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간 나에게 ‘올인’은, 내 인생을 내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그 무언가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6) 꿈
생존 본능이 나를 지금까지 어찌됐건 ‘살 수’는 있게 만들었다. 생존 본능, 이라 함은 앞서 언급한 ‘올인’하려는 습성, 확신에 찬 태도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나에게 생존 본능처럼 작용했던 건 꿈에 대한 열정이었다. 꿈이 인생의 전부라는 환상, 고집, 욕심이 지금껏 나를 숨 쉬고 살게 했다.
그러나, 살면서 함께 가야할 가치들이 너무나 많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꿈과, 현실과, 사랑과, 행복과, 미래, 그 많은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와중 무엇을 ‘전부’로 둔다는 것은 사실 그 ‘전부’를 오래 만끽할 시간을 오히려 줄이는 것과 같다, 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덜 노력하겠다, 게을러지고 싶다,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싶다, 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어느 하나의 부담을 줄수록, 오히려 그 부담에 그렇게도 소원했던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등단을 한 후 오히려 나는 작품을 쉬이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만큼 바라고 바라왔던 것을 이뤄냈다는 오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어떤 허무함이 더 컸다. 더 이상 무엇을 원동력 삼아 나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나의 꿈은 더 이상 관계로부터 인정욕구를 해소시키지 못한다. 더 이상 무언가를 ‘인정받아야 한다’라는 수단으로서 ‘꿈’은 작동하지 않는다. 나의 삶과 ‘꿈’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 점검이 필요해진 것이다. 나는 나의 꿈이,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서 오래도록 지속가능한 호흡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게 꿈(글을 쓴다는 것)이라는 세계가 나의 가치관을 제대로 느끼게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세계가 여러분들의 세상과 접속하려는 소통의 시도가 나의 ‘꿈’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역사를 나 스스로 인정하고, 인간적인 보편특수성도 함께 공감하려는 시도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주장하거나, 새로운 사조를 위해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갈 수 있는 서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지금의 나를 찬찬히 돌아보고 그것을 소통하고 다른 사람의 어떤 것에도 찬찬히 공감하려는 서사.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7) 모순
‘모순’에 대한 담론이 나의 작품과 나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주제였다. 극과 극이 공존하는 ‘모순’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을 견디게 하는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순적 관점은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내가 드디어 평화에 도달하여도 나를 계속 불안케 했다.
모순적 관점, 필요하다. 어떤 악인에게서든 선함을 집어내고 비극 속에서도 희극을 보고 성스러운 장소에서 세속을 목격하는 그런 시선.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모순적 관점에 도취된 나는 기이한 자학과 착취 관계를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악연에서 미래를 도출하고, 폭력에서 애정을 발견하려 하고, 피해자에게서 잘못을 파악해내려 하는 식.
네가 있는 시궁창이 얼마나 사실은 영롱하냐는 말보다 드디어 시궁창에서 벗어나 꽃이 펼쳐진 들판이지만 사실은 얼마나 초라하냐는 시선으로 되돌아올 바에야 그런 모순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이제 거두고 고독과 오만을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8) 상대적 기준과 보편적 윤리
나는 어쩌면 인정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당한 폭력의 피해, 가스라이팅과 트라우마에 대한 후유증에 대해 나는 별로 그렇게 ‘힘들지’ 않고, 그런 게 ‘힘들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은연중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피해자고, 혼란스럽고 힘든 게 당연하고, 어쩌면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할지 모른다. 폭력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계속 이어지면서, 내가 정말 ‘피해자’인지, ‘힘들어도 되는지’에 대한 대답을 멀리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을 상대적으로 파악하고 생각하려던 습관이, 오히려 나 자신을 멀리하게 만드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절대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절대성은, 보편타당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를 기반으로 한다.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나와 타인을 헤치지 않는 영역을 수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공평’한 ‘상대적’인 사고 자체를 위해, 나의 고통을 다른 어떤 것과 저울질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를 존중하고, 그래야 타인도 나를 존중할 것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