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로부터.

만년필.

by stay gold




만년필 몇 자루를 세척했다.


스무 자루를 넘겼을 즈음부터 모든 만년필을 골고루 쓰는 것은 포기하고,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서너 자루를 골라 한동안 사용한다. 다음 서너 자루에 잉크를 채울 땐 사용 중이던 것들은 깨끗이 세척하여 보관한다. 전통 있는 브랜드의 경우 편리함을 따르지 않고 만년필 몸통에 잉크를 저장하는 옛 방식을 고수하기도 하는데, 이런 펜들은 깨끗이 세척하기 위해 하루이틀 미온수에 담가 두기도 하니 관리에 들어가는 시간이 적잖다.




잉크를 채워 사용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에 닿는 닙(nib)이 내 필기 습관이 맞춰 변형되는 등 긴 호흡으로 사용하는 만년필은, 관리할 때의 호흡도 짧지 않다. 편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이들은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 귀찮지 않느냐 물어오기도 한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편리의 포기에 따른 긴 호흡까지도 헤리티지, 온전히 만년필을 소유하는 즐거움이다. 컴퓨터 키보드나 터치 펜, 볼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이다.





아름다운 외양을 보는 맛과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쓰는 맛도 좋지만, 불편을 자처하며 관리하는 맛이야말로 만년필의 참맛. 관리함의 맛이 깊어질수록 앞의 두 가지도 덩달아 깊어지니, 그야말로 참맛이다.


만년필을 가진 사람, 만년필을 쓰는 사람을 넘어 만년필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 느끼는 이 맛이 소중하다. 아끼고 챙기는, 이 온전한 소유로의 과정이 참 좋다.


인스턴트가 아니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