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작은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동안 편찮으시단 말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들어 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로 실려간 후 8시간의 뇌 수술을 받고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병명은 '뇌염', 하지만 의사도 감염 경로도 알 수 없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 있는 원인은 코로나 백신 접종 후유증. 2차 접종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거라 사촌 오빠가 자료를 찾아봤다. 우리나라에는 보고 된 게 없는데 미국 자료에는 백신 후유증으로 뇌염이 보고 된 게 있다고 한다. 현재로선 그것밖에 달리 의심해 볼만한 게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나 뵙고 그나마 내가 결혼하고부터는 집안 대소사가 있어야 뵐 수 있는 사이였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에 황망하기도 하고 작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3일을 장례식장에서 불편한 잠을 주무시며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 해주시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첫째 날 남편과 밤늦게 갔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을 아무도 못 만났지만 둘째 날 저녁에 간 오빠와 동생은 친척들을 두루 만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친척들 대소사를 성심으로 잘 챙기셨다. 마음뿐 아니라 먼 거리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부조도 우리 형편에서 최선의 금액을 하셨다. 게다가 서울에서 잔치가 있을 경우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은 행사 후 꼭 우리 집에 들러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놀다 가거나 자고 갔다. 그때는 어른들이 술에 취해 시끄러워지는 것도 싫고, 심부름할 일이 많아져서 엉덩이 붙이고 앉을 새 없으니 뒤풀이가 참 싫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같이 밥 해 먹고 잠도 자고 뒤엉켜 살던 때가 그립다. 요즘은 어쩌다 만나도 행사 끝나고 차 한잔 하기도 힘드니 말이다.
장남으로서 의무도 있었겠지만 형제들 간의 우애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살갑게 자주 통화하거나 만나지는 않으셨지만 대소사를 잘 챙기는 것이 아버지의 형제 사랑 방식이셨던 것 같다. 아무리 형제들 간에 갈등이 있어도 동생들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모두 꺼리는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고도 아무런 공치사도 바라지 않으셨다. 그저 형제끼리 잘 지내면 그걸로 족한 분이었다. 자식들에게도 공부하란 소리는 안 하셨어도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고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유일한 잔소리였다. 오빠나 동생과 싸우면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모두 벌을 받았다. 이유와 상관없이 형제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철칙이었다.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기시는 걸 우리 형제들도 당연하다 생각하고 지금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집안에 일이 있을 때 항상 잘 챙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형제끼리도 서로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하며 의좋게 지낸다.
큰 고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꽤 큰 금액을 부조하셨다. 살아생전 큰 고모부와 아버지는 각별하셨기에 우리 모두 그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 고모가 아버지가 부조한 금액의 반밖에 안 했다고 엄마가 기막혀하는 소릴 들었다. 게다가 오빠는 휴가까지 써가며 큰 고모부 장지까지 따라가서 장례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보다 더 해도 될 만큼 우리 아버지 덕도 보고 돈도 다 못쓰고 죽을 만큼 많은 사람들인데, 생판 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키는 도리를 무시하고 매번 얄미운 짓을 하니 그들도 참 어지간하다. 그들에게 우리가 그만큼의 의미밖에 안되는 것이니 그들을 탓할 것도 없다고 형제들끼리는 정리했지만 엄마는 본전 생각이 나서 엄청 분해하셨다.
둘째 고모는 아버지 장례식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몸이 아팠다고 하는데, 얼마나 아팠는지는 모르겠지만 친오빠 장례식장에 못 올 만큼 아팠을까. 그래 아팠다 치자, 그런데 그 집 자식들도 한 명도 안 왔다. 둘째 고모부만 와서 술 드시고 시끄럽게 주정을 해 우리를 난처하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집안의 장남이고 형제들을 그렇게 챙기셨음에도 친척들은 가난한 우리 집을 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본인들 아쉬울 때만 아버지를 이용해서 이익만 챙길 뿐...
장례식장에서 오빠와 동생을 만나니 이 사람들이 말이 많아진다. 큰 고모네 오빠는 너희는 장례식 때 장지까지 가줬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못 챙겨서 미안하다고, 둘째 고모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못 갔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느라 그 자리가 좌불안석이다. 어차피 그런 사람들인 거 알고 있어서 그들이 오건 말건 우리 형제들은 별 신경 안 쓰는다. 그냥, 에이 못났다 하고 만다. 이번뿐만 아니라 몇십 년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며 그들의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다. 동생을 보니 민망했는지 묻지도 않는데 주저리주저리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더란다. 이걸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하는 건가? 동생 왈 "누가 뭐랬나? 나는 가만있는데 자기들이 지레 찔려서... 그러길래 잘하지"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재혼을 하셔서 그 집엔 아버지가 다른 두 명의 사촌이 있다. 불편하기도 했을 테고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두 명의 사촌은 집안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당연히 장례식장에서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작은아버지 친 자식인 그 집 막내만 삐쭉 얼굴 내밀고 몇만 원 부조하고 갔는데 어떻게 낯 뜨거워서 그걸 부조라고 들고 왔는지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런데 우리는 삼 형제가 모두 참석해 위로하고 부조도 적지 않게 하니 민망해하더란다.
매번 정말 똑같이 해주고 싶지만 아버지 욕 먹이기 싫어서 참는다. 그들의 마음이 우리 마음과 같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많이 받고 적게 돌려주면 추하다. 최소한 상도덕은 지켜야지...
나도 전에 친한 동생의 딸 돌잔치에 초대받았는데 부조를 마음껏 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그 동생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음은 더 하고 싶었다. 너무 쪼들리게 살다 보면 모든 지출에서 경직되게 된다. 고민하다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는데, 그 후에 그게 그렇게 찝찝할 수가 없었다. 몇만 원 더 낸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후회막심이었다. 나는 분수에 맞는 부조를 했지만 때로는 분수를 거슬러도 되는 관계도 있다. 나중에 그 동생이 둘째를 낳고 첫째 때 못한 몫까지 더해서 부조하고 나서야 마음 한구석의 짐을 내려놨다. 그 후론 부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는다. 10번 밥을 사도 상대에게 축하할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제대로 성의를 표시하지 않으면 그전의 밥 산 것은 모두 도루묵이 된다. 경우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제때 할 도리를 해야 떳떳할 수 있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보다. 그들은 몇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잘만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