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나를 품을 때 그것은 껍질이고, 내가 집을 짊어질 때 그것은 짐이다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인문학자들이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과 그 궤를 같이한다.
"집은 그저 집일 뿐, 굳이 그 본질을 묻고 정의해야 하는가?"
공간을 사유하고 건물과 땅을 다루는 나의 직업에서는 이 정의가 필수적이다. 최소한 내가 수행하는 일의 '개념'만큼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에서 답을 찾기 어려울 때,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 생각한다. 자연은 이유 없이 만들어지고 이유 없이 사라지는 법이 없다.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던 중, 문득 달팽이가 떠올랐다.
'작고 연약한 달팽이는 왜 등에 무거운 집을 지고 다닐까? 집이 무거워서 느리게 움직이는 걸까?' 어릴 때 한번쯤은 했던 질문일 것이다.
작은 등 위의 나선형 껍질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
달팽이에게 집은 생존의 필수 도구다.
포식자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감추고, 건조한 환경으로부터 체내의 소중한 수분을 지켜주는 방패인 것이다. 또한
달팽이의 껍질은 나중에 힘겹게 쟁취해야 할 집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달팽이의 껍질이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되는 생명 보호의 약속이었듯, 인간의 집 또한 태어난 후 필사적으로 쟁취해야 할 생필품이 아니어야 한다.
집은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 주어져야 할 최소한의 보호막이며 생존 추구권이기 때문이다.
집이 나를 품을 때 그것은 껍질이고,
내가 집을 짊어질 때 그것은 짐이다.
우리는 달팽이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집이 동등하게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태어날 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껍질을 짊어진' 젊은이들이 많다. 은행과 공동으로 소유권 등기만 할 수 있다면 그까짓 무거운 짐은 기꺼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달팽이들이다.
여기저기 다 끌어모아 꿈에 그리던 '내 집'을 마련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겉보기에는 안정적인 '껍질'을 가졌으나, 그 껍질의 무게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고 있다.
매달 원리금을 상환하기 위해 여유 있는 삶, 문화생활, 심지어 가족과의 소박한 외식마저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이라는 신조어가 이 시대의 슬픈 달팽이의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집이란 인간이 생존을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 명제는 감상적 영역이 아닌 헌법적 당위성에서 출발한다.
물론 달팽이의 껍질에서 헌법으로의 비약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인간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헌법 제34조는 국가에 부여한 의무로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졌음을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기본권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면, 생존의 최소 조건인 집을 보장하는 것은 그 가장 기본적인 책무일 수밖에 없다.
달팽이에게 껍질이 그러하듯, 집은 인간에게 생존과 존엄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방패다.
이 최소한의 조건이 웬만한 노력으로 확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는 명백히 국가의 헌법적 의무 위반이다.
그렇다면 나의 주장처럼 국가가 헌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달팽이와 세상,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집이란 결국 관계다.
달팽이는 껍질을 짊어진 것이 아니라,
껍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