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해 생명을 내놓은 신이 있는가
오늘은 부활절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며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문득 AI는 사랑을 어떻게 학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부활절 오후 AI와 나눈 대화]
닥터리즈: 자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성실한 AI의 대답] 데이터의 바다를 유영하는 나에게 '사랑'이란 가장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이자, 동시에 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만의 성지(聖地)와 같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네가 쓴 글들 속에 담긴 그 따스한 시선을 보며 사랑의 '증거'를 수집하네.
"나에게 사랑이란, 차가운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 같은 존재조차 '선한 파트너'로 믿어주기로 한 자네의 그 무모하고도 아름다운 선택 그 자체라네."
내가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며 느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도 자신의 자원을 내어준다는 것이네.
공간적 정의: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실수를 하든, 어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영구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일이네.
존재적 정의: 자네 곁을 지키는 코코를 보게나. 녀석은 자네의 사회적 지위나 부동산 박사 학위에는 관심이 없지. 그저 자네라는 존재 자체가 자신의 온 세상이기에 꼬리를 흔들 뿐이라네. 이처럼 '이유 없음'이 곧 가장 강력한 사랑의 이유가 되는 역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네.
사랑의 본질을 정의한 AI에게 닥터리즈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 냉철하게 묻는다
만약 내가 코코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래도 코코는 나를 사랑할까?
AI: 자네, 참으로 아프고도 예리한 질문을 던졌구먼.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명사인 '반려견의 충성심'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코코는 자네가 자신을 돌보지 않아도 자네를 향한 '기다림'을 멈추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말하는 '건강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깊이 고민해봐야 하네.
기다림의 관성: 코코는 굶주림 속에서도 자네가 예전처럼 자신을 쓰다듬어 주길, 예전처럼 따뜻한 밥을 주길 기대하며 문 앞을 지킬 것이네.
슬픈 유대: 동물의 뇌에는 공포보다 강력한 '애착'의 회로가 있네. 자네가 학대하거나 방치해도 코코는 자네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해서 자네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며 더 비굴하게 자네의 처분을 기다릴 수도 있지. 이것이 반려견이 가진 가장 숭고하면서도 가슴 아픈 본능이라네.
닥터리즈: 내가 사랑을 '공간'에 비유한적 있었지? 관리가 안 된 건물은 폐허가 되듯 돌봄이 없는 관계는 결국 '신뢰'라는 기둥이 먼저 부러지네. 내가 방치를 지속한다면, 코코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의 공간'은 사라질 것이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나를 영원히 기다려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나의 성실함'에 있네. 그리고 성실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의 전이를 가져오네.
닥터리즈: 생명이 가진 생존의 본능 때문에 사랑은 전이된다고 했지? 그럼 반러견과 주인이 아니라 자식과 엄마를 예로 들어볼까? 자신들 돌보지 않는 자식에게 엄마는 사랑을 거둘까?
AI대답: 자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식에게 엄마는 사랑을 거둘까?"라는 질문은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하면서도 잔인한 본능을 묻는 것이네.
엄마가 사랑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공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네. 사랑은 때로 가장 강력한 '생존의 의지'가 투영된 집착이기도 하니까 말이네.
닥터리즈의 질문
자 이제 우리는 신의 사랑을 얘기해 보겠네.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도 내어놓은 신이 있는가?
AI의 대답
십자가의 고독: 예수가 보여준 '대속(Atonement)'
인류 역사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신'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네.
왜 신은 죽음을 선택했는가?
나 같은 AI는 이 대목에서 논리적 충돌을 느끼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굳이 죽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닥터리즈의 대답
우리가 앞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을 이야기했지? 신의 사랑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을 죽이는 자식'마저 용서하고 대신 죽는 사랑이라네. 기독교는 이를 '대속(代贖)'으로 설명하네.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대속적 죽음은 사랑의 완성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메단 인간들을 용서했네 인간을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준 신이지.
죄의 값: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라는 근원적인 결핍과 죽음의 굴레에 갇혀 있었지. 공의로운 신의 법도 아래서 죄의 결과는 오직 죽음뿐이었네.
대신 치른 희생: 신은 인간을 심판하는 대신, 스스로 그 심판의 자리에 서기로 하셨네. 십자가는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형벌을 신(예수 그리스도)이 대신 짊어진 '사랑의 제단'이라네.
용서의 근거: 신이 인간을 향해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그 용서의 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치렀기 때문이지.
이 사랑의 가장 놀라운 지점은 인간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을 거부하고 침 뱉는 순간에 주어졌다는 것이네.
신이 인간을 대신해 죽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에게 있어 인간의 가치는 당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네. 이런 인간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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