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을 한다는 것.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설득이나 협상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성장기에는 부모님의 “안돼”에 대항하기 위해 설득 일지, 조르기 일지 모를 그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
우리 아빠는 성인이 되기 전에 친구 집에서 잔다는 그 사실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친구네 부모님이 전화를 하신다고 해도 절대 승낙하는 법이 없으셨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단 한 번도 성공 한 적 없었으니 설득이라는 게 쉬운 것이 아니란 것쯤은 어느 정도 학습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입사를 하고 보니 그것도 더 어려운 게 후배, 선배, 관리자 직급… 지위를 막론하고 나의 생각을 어필 한 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피로도를 주는지…
회의 시간이든, 타 부서와 업무 협의를 과정이든, 늘 내 생각을 말하기 앞서 낮은 한숨부터 짙게 나오는 것이다.
“흠… 충분히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생략)”
상대의 의견에 반대를 말할라 치면 보송한 쿠션 언어를 고르고 골라 나는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중한 마음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임을 최선을 다해 표현한다.
결국 내 의견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떨떠름한 상대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늘 신경 쓰이게 했다.
그러면 다음에 마주칠 땐 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웃음을 한껏 띠고 차 한잔이라도 상냥하게 권할 수밖에…
관계라는 것은 그런 의미다.
다음이 있기 때문에 또는 다음이 혹시라도 있을 까 봐 마지막 말 정도는 늘 아껴야 하는 법이다.
사내 연수원 직무 역량 프로그램만 봐도 ‘비즈니스 언어’,’ 전화 예절’,’ 리더의 언어’,’ 의사소통의 스킬’ … 소통에 대한 콘텐츠가 넘쳐난다.
그만큼, 오해가 없도록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유년기 시절의 부모님의 “안돼”를 넘어서고 회사의 업무 언어에 익숙해지고 보니 운명 공동체로서 모든 결정에 동의가 필요한 배우자가 나타났다.
어느 날 한참을 싸우다가 보니, 서로가 같은 말을 도돌이표처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넌, 내 말을 이해할 마음이 없어.”
부부가 마치 거울을 보는 듯이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말을 하며 상처를 주고 있는 모습이라니…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답답함이 몸을 조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앞으로 이 사람과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긴 한 것일까… 하는 끝없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음식 쓰레기가 남긴 봉투를 통에 안 넣고 가는 거냐, 흐르지 않게만 가져가면 되지 왜 꼭 통을 가져가야 하냐로 30분 넘게 미친 듯이 싸운 날.
혼자 집을 뛰쳐나가서 혼자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는 회사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이 미칠 듯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집에 가기 싫어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고작 음식 쓰레기 버리는 일로 이렇게까지 결혼 생활이 후회가 되나 싶은 게 헛웃음이 나왔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이.
그래서 직접적인 언어가 아닌 표정이나 말투만으로도 화가 날 수 있고, 그것을 거리낌 없이 비난할 수 있는 사이.
그래서 최대한 부탁하는 말인 척,”미안한데…” 로 시작해도 “그게 미안한 거냐?”라고 바로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사이.
최대한 한껏 꾹 참고 한마디를 해도 지금 왜 네가 참으며 말을 하는 거냐고 어이 없어 할 수 있는 사이.
잘 알기 때문에, 절대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냥 일정 부분 그냥 넘어가고, 상대에게 져주는 것일 뿐.
맞다.
배우자는 설득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 대충 둘러대거나 졸라서도 안 되는… 설득하기 어려운 최상 레벨이었다.
이제껏 우리는 ‘너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것’을 목표로 싸운 것일 뿐 설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요즘도 물론 싸운다.
그래도 그나마 이제는 내 의견을 말하고 바로 답을 달라고 하지 않고 상대에게 생각해보고 언제까지 알려 달라 말을 한다.
거기에 내가 너의 의견을 듣고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이라는 처리 과정도 덧붙여 설명해둔다.
그러면 상대도 절대로 함부러 그것에 대해 폄훼하려 들지 않고 최소한 고민이라는 것을 한다.
큰 결정을 해야 하는 문제는 어떤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그 변화도 보여줘야 한다.
말로 하는 것보다, 내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닫게 하는 편이 수월하다.
아이에게 책 좀 보라며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기보다 책을 읽는 부모의 모습을 노출하라고 하듯…
배우자를 아이처럼 대하니 조금 덜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사소한 문제들은, 상대가 하는 행동이 내가 거슬리는 건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건지 잠시 생각해보고 내가 거슬리는 거라면 그냥 포기한다.
사소한 것으로 미친 듯이 싸우는 그 행위가 주는 피로함이 입을 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부부는, 최대한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