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세상과 단절되어야만 했던 그 시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버텨왔을 것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과만 만나야 했고, 인간으로서 사회와의 단절을 오래 견딜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책과 식물이었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었고, 햇살이 좋으면 흙을 만지며 하루를 보냈다.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달래며, 나는 그 시간을 사랑했다. 책을 한 권 한 권 끝내는 내 자신이 내심 뿌듯했다. 누가 시켜서 읽는 학창 시절의 독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독서의 시간이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건지, 작가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그들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글이라는 수단이 매력 있고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삶을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조금 더 알차고 생산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어, 글쓰기 인터넷 수업을 신청했다.
늦은 나이에, 나에게도 선생님이 생겼다.
수업을 받으며 깨달았다. 글을 무작정 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 독자들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저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그것은 일기에 불과하다는 것. 굳이 출판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누군가 돈을 주고 내 글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에세이 스타일의 글을 쓰고 출판하려면, 어느 정도는 인플루언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뼈 때리는 한 방이었다.
수업을 통해 내가 원했던 에세이 스타일의 글을 쓰는 것이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그 에세이의 작가를 궁금해 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나의 열정은 한층 가라앉았고, 과연 내가 써야 할 글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글을 향한 열정보다는 단념이 남은 수업이었다.
남은 과제는 성실히 끝냈지만, 의욕적으로 끝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독자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물었다.
“엄마, 요즘은 글쓰기 숙제 없어? 글 안 써?”
“왜?”
“엄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엄마 글쓰는거 좋아?”
“응! 좋은데 요즘 안 쓰는 것 같아서.”
얼마 전, 아이들과 도서관에 갔다. 항상처럼 아이들 책을 잔뜩 빌렸다. 이번엔 빌릴 권수가 여유 있어서 오랜만에 나도 책을 빌렸다. 요즘 특별히 복잡한 일은 없지만, 가볍게 읽고 싶은 마음에 ‘마쓰다 미리’ 책 한 권과 글쓰기 관련 책 두 권을 골랐다.
독자로 남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어느새 글쓰기 섹션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미련이 남은 걸까.
그걸 본 둘째가 말했다.
“엄마, 다시 글 써보기로 했구나?”
“그냥 빌린 거야.” 나는 대답했다.
사실 인터넷 수업이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출판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상업적 글쓰기의 객관성도 배웠다.
글이라는 수단으로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유익함을 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나는 아직 어떤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것이 확실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정보를 글로 쓴다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그런 글은 나와 맞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글쓰기에 익숙해지고, 생각이 더 명확해진다면 그때는 충분히 조사하고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보고 싶다.
지금은 그보다는 내가 먼저 쓰고 싶은 이야기를 꾸준히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