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유예하는 태도

부부 독서토론 2번째 책 - 이방인

by 조이버스


판단을 유예하는 태도


남편과 진행하고 있는 부부 독서토론. 이번에 읽은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책은 출판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골랐다. 책 표지에 궁서체로 적힌 "이방인" 세 글자가 나를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출판사의 책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는데, 이유는 과거의 한 경험 때문이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는데, (아마 당시에는 이런 전집을 사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의 집에도 항상 비슷한 전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책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의 표정 속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보였었다.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해, 나는 그 전집을 한 권이라도 읽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문체가 낯설고,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아 읽는 행위 자체가 괴로웠다. 패배감과 좌절감을 느낀 나는 그 이후로 전집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어찌 보면 독서에 대한 트라우마를 준 책. 이제는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놀랍게도 30대가 된 지금, 이 책을 읽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읽으며 인물과 사건에 나만의 해석을 담으니,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책이 왜 명작인지에 대해 다른 사람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다는 점이 나를 굉장히 흥분하게 만들었다.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후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남편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만의 해석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정답을 떠나, 블로그에도 우리만의 해석을 남겨보려고 한다.


(1) 판단을 유예하는 태도를 가지자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을 다루는 작품은 많다. 하지만 이 책이 다른 작품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단순히 범죄 행위와 그에 따른 처벌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이 소설은 뫼르소가 무엇을 저질렀는가 보다, 그가 어떻게 심판받는가에 더 집중한다. 뫼르소는 이야기 초반부터 냉담한 인물로 그려진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 다음 날, 바다로 놀러 가 여자친구를 만난다. 일반적인 사회 규범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이후 살인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 뫼르소는, 범죄의 정황보다도 장례식장에서 보였던 그의 태도를 근거로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인간으로 규정된다. 그는 살인범이기 이전에, 사회가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진 존재였고, 결국 참수형을 선고받는다. 살인은 분명 중대한 범죄다. 그러나 내가 분노를 느낀 지점은 처벌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순간의 태도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버린 과정이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분노했던 대상은 검사와 배심원들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자,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만 돌아봐도 그렇다. 길을 가다 나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많은 판단을 내렸다.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그 사람의 본질과 인격으로까지 확장해 평가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급한 일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지친 몸으로 주변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걷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의 태도는 분명 잘못이지만,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남긴 문장은 이것이다. "판단을 유예하는 태도를 가지자."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뫼르소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뫼르소의 과거가 궁금했다. 책에서는 단호할 정도로 뫼르소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어릴 적 뫼르소가 부모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엄마와 거리가 멀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애초에 거리가 멀어지긴 했던 건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뫼르소의 과거와 성장환경을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뫼르소는 사형이라는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이상 그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아쉬웠다. 이 마음을 꼭 간직해서, 현실에서는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와 대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2) 감정에는 정답도, 의무도 없다

사람마다 슬픔을 느끼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눈물로 애도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시간을 견딘다. 관계의 깊이, 기억의 밀도, 감정을 표현하는 성향에 따라 슬픔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장례식에서는 반드시 울어야 할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역시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었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슬퍼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또한,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여행을 갈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여행이 슬픔으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기분전환일 수도 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삶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밥은 먹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만 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작중 검사는 ㅡ최소한 내가 느끼기에는ㅡ 뫼르소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그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태도를 더 문제시 여기는 것 같았다. 뫼르소가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가 끝내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뫼르소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 슬픔을 표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슬프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슬픔은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영화 조커와 책 이방인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모두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다. 뫼르소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아서는 정상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뫼르소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이었다. 뫼르소의 범죄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았다. 다만, 눈부신 햇살과 달아오른 공기,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마비되어 오는 감각은 그를 범죄자로 만들게 된다. 나에게는 이 장면이 궁지에 다다른 인간의 폭발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영화 조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서 플렉이 토크쇼에서 머레이에게 총을 쏘는 순간이다. 그 장면에서 흐르던 배경음악은 점점 고조되며 아서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좌절, 고립감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두 장면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폭력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두 인물이 억눌러왔던 감정과 고립이 마침내 표면 위로 터져 나왔다는 그 사실에, 내 스트레스도 같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을 억누른 적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이 나에게 묘하게 겹쳐 보였던 게 재미있게 느껴져서 짧게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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