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고 생생했던 기억과 감정은 올바르게 처리되지 않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 쌓여서 뻣뻣하게 굳는다. 그런 응어리는 천천히 나를 고장 낸다. 그래서 무섭고 아픈 경험이더라도 억지로 끄집어내어 주물러야 한다. 다시 곱씹고 소화해야 한다.
난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랐다. 어느 날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는 나를 죽이고 본인도 죽겠다며 부엌에서 무딘 식칼을 들고 와서 내 명치에 들이밀었다. 그 서늘하고 뾰족한 감촉만큼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왜곡된 사랑을 알고는 있어서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찔렀다면 아버지가 후회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그때 나는 웃었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지만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이 상황이 무마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기억나지 않는 협박과 수긍으로 그 상황은 그렇게 지나갔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을 이어나갔다. 그 이후였는지 이전이었는지 수없는 매질로 엉덩이가 전부 퍼렇게 멍들었다가 까맣게 딱딱해졌던 기억도, 던킨도너츠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장난감 나무 젠가로 머리를 찍혀서 피가 주르륵 흘렀던 기억도 생생하게 난다. 아버지의 일장연설을 듣는 순간은 늘 살얼음 같았다. 순식간에 불같이 화내고 뺨을 올려붙이는 아버지를 정말로 무서워했다. 다시 말하지만 왜 맞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맞았던 장면과 그때의 공포스러운 감정들은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아버지의 폭행이 내게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강력한 초자아가 되어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맞은 이유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 이야기와 규율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맞을만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남의 의견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화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맞을만한 모자란 사람이고,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어설픈 사람이 되었다. 사랑받기 힘든 사람이 되었다. 이런 피해망상적인 자기 인식은 은연중에 내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내 인생을 그 영향력으로부터 뺏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발심리로 더 과장해서 의심하고 화낸다. 사랑받을 때는 뻔뻔하게 군다. 나에게 한없이 엄격하게 군다. 아버지가 내게 좆같이 굴어서 내가 평생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억울하다. 어떤 싫은 모습은 온전히 내 탓일 수도 있는데 아버지 탓으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 비겁하다.
나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다. 그것은 반항정신에서 나온다. 내가 겪은 과정은 옳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옳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온전히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책임짐으로써 증명된다고 믿는다. 최소한 내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