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모양 Mar 24. 2021

그냥 아무것도안 해도 괜찮네요

남미 여행기 #17. 여행 중에 쉼표를 찍는 일

마추픽추를 다녀온 다음날. 우리는 옥상 뷰를 즐기며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메뉴는 단한 한 그릇 음식, 볶음밥. 숙소는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중턱 연립주택이었다.


우리는 슬렁슬렁 시내를 둘러보다가 오후 즈음에 시장에 들러 장을 봤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시장 속으로 나란히 입장해, 구불구불한 시장 안을 돌아다녔다. 맛 좋은 볶음밥을 위해 필요한 재료를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키며 짧은 스페인어로 ’몇 개 주세요’를 말했다.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은 서툰 외국인 여행객의 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모두 끄덕끄덕 하며 야채와 과일을 봉지에 담아줬다. 양파와 소금을 어렵지 않게 찾아 구매했다. 자잘하게 썰어져 있는 채소를 팔길래 이거다 하며 채소 세트도 구매했다. 한국인의 입맛에 흥을 돋워줄 마늘이나 파는 없었지만, 꽤나 먹음직스러운 쌀을 구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삼십 분가량을 돌아보니 어느새 작은 비닐봉지가 가득 찼다.


“새우는 못 찾겠네요.”

“우리 그냥 참치 볶음밥 만들어 먹을까요?”

“좋아요! 맛있겠네요.!”


마트에 들러 참치 통조림까지 사니 양손에 든 봉투가 묵직해졌다.


'호호. 이 정도면 적당히 구색을 맞춘 볶음밥을 만들 수 있겠군.'


숙소에 와서 묵직한 장바구니를 풀어놓았다. 밥을 안치고 야채를 썰었다. 버터 두른 팬에 복닥복닥 야채를 볶고 밥과 참치 통조림을 넣었다. 먹기 좋은 향이 났다. 고소하게 풍기는 버터향과 야채의 노릇한 빛깔이 맛스러웠다.


완성된 볶음밥을 들고 서둘러 옥상에 올라갔다. 한국에서 챙겨 온 고추장의 매운맛을 더하니 완벽한 맛이다. 야무지게 먹었다.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맥주를 한 잔 더하니 금방 날이 저물었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즉흥적으로 보낸 하루 일과였지만 매우 만족스러웠다. 숙소는 훌륭했으며,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쿠스코의 전경은 끝내주게 멋졌다.


우리는 남들이 머무는 곳이 아닌 우리만의 공간에서 우리만의 식탁을 차리고 훌륭한 시간을 채웠다. 그래. 이게 바로 좋은 여행이지. 나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이런 황금 같은 일정을 만들어놓은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큰 계획 없이 비워둔 날이었기에 걱정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이 하루가 없었으면 쿠스코에서 밥 해 먹는 추억이 없어 무척 아쉬웠을 거야’ 싶었다.


종일 우리는 여정에 쫓기지 않는 자유인처럼 존재했으니까.

노래를 할 때 적절한 위치에서 숨을 잘 쉬는 게 중요한 것처럼.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종종 쉼표가 필요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이. 여백의 미. 여행의 미. 이런 게.

작가의 이전글 페루 하면 생각나는 맛, 루쿠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