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보이지 않는 감옥 (회피성 성격장애)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시스템에서 로그아웃시킨 사람들

by 흔들리는 전문가

이 글은 책임을 묻기보다, 경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무거운 구름이 창밖을 가득 채운 오후다. 상담실의 공기는 유독 밀도가 높다. 누군가 이곳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텅 빈 방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내 앞에 앉은 내담자 H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고, 그가 앉은 의자에서는 어떠한 마찰음도 들리지 않는다. 25년 동안 수많은 마음을 만났지만, 스스로를 이토록 완벽하게 시스템에서 로그아웃시킨 영혼을 마주할 때면 임상가로서의 나 역시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낀다. 그의 침묵은 비명이 아니라,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설계된 방음벽의 적막이다. 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그가 스스로를 가둔 이 보이지 않는 감옥의 도면을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심리학적 평가보고서: 내담자 H의 기록

의뢰 사유 및 주호소

내담자 H는 최근 발생한 기업 내부 기밀 유출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자 방조 혐의로 의뢰되었다. 그는 해당 업체에서 3년 동안 재택근무를 하며 시스템 보안을 관리했으나, 회사가 불법적인 데이터 거래를 하는 정황을 인지하고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수사 기관의 연락을 수개월간 회피하며 은둔했다. H는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보다 타인과 마주하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극심한 공포와 공황 발작을 호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다고 진술한다.


성장 과정 및 생활사

H는 완벽주의적이고 비판적인 부모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부모는 H가 성취를 이룰 때만 제한적인 애정을 보여주었으며, 작은 실수에도 수치심을 자극하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H에게 세상은 늘 채점관이 도사리고 있는 시험장과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H는 발표 도중 작은 말실수를 한 뒤 반 아이들이 웃자 그날 이후 학교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들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자신의 물건을 모두 내어주면서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면접에서의 연이은 탈락은 그에게 거절이라는 치명적인 해킹으로 다가왔다. 그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끊고 오직 모니터 뒤에 숨어 데이터와만 소통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변인의 목소리 (1)

H의 어머니는 상담실 밖 복도에서 마른 손을 맞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는 원래 숫기가 없었을 뿐이에요. 어릴 때부터 말썽 한 번 안 부리고 자기 방에서 공부만 하던 착한 아이였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애가 아니에요. 그냥 조금 조용했을 뿐인데, 세상이 우리 애를 너무 몰아세운 것 같아요. 그 조용함이 사실은 애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주변인의 목소리 (2)

H가 일했던 회사의 동료는 서면 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H씨요? 3년 동안 같이 일했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요. 메신저로만 대화했는데, 항상 알겠습니다, 제가 할게요라는 말만 반복했죠. 업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조금이라도 피드백을 주려고 하면 며칠씩 답장이 없거나 접속을 끊어버리곤 했어요. 우리는 그가 그저 성격이 특이한 천재 개발자인 줄로만 알았지, 그런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면서까지 거절을 못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행동 관찰

면담실의 H는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나를 향하지 않았으며, 바닥의 타일 무늬를 세는 듯한 시선 처리가 지속되었다.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그의 목덜미와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고, 테이블 아래로 숨긴 그의 손가락은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서로를 꽉 쥐고 있었다.

대화 도중 침묵이 길어질 때면 그는 숨을 멈추는 듯한 양상을 보였으며, 자신의 옷자락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반복적인 행동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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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억, 진실과 왜곡 사이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을 저서 《뇌의 배신》, 《흔들리는 전문가》 시리즈를 통해 서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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