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이들의 슬픈 보고서
오후 네 시의 상담실은 늘 길게 늘어진 그림자만큼이나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저녁 볕은 따뜻하기보다 서늘한 진실을 들추어내는 조명에 가깝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방에서 수천 명의 무너진 세계를 목격해왔음에도, 오늘 내 앞에 앉은 내담자 M의 등을 마주하는 내 마음은 정돈되지 않은 서류 더미처럼 어지럽다. 책상 위에 놓인 미지근한 찻잔에서는 더 이상 김이 나지 않는다. 나의 손끝은 습관적으로 펜을 만지작거리지만, 정작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가야 할 문장들은 목구멍 근처에서 자꾸만 흩어진다. 인간의 고통을 판단 없이 응시하겠다는 나의 오랜 다짐이, 타인의 손에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양도해버린 한 영혼의 비극 앞에서 자꾸만 흔들리는 탓이다.
심리학적 평가보고서: 내담자 M의 기록
의뢰 사유 및 주호소
내담자 M은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대규모 전세 사기 사건의 핵심 피의자 조력자로 분류되어 검찰로부터 심리 감정을 의뢰받았다. 수사 기관은 M이 주범 A의 지시를 단순히 수행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담한 것인지에 대한 임상적 소견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면담실에서 만난 M은 자신의 법적 처벌 수위나 사회적 지탄에는 무감각한 상태다. 그가 호소하는 유일하고도 극심한 고통은 자신을 이 범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연인 A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는 A가 없는 세상은 산소가 없는 방과 같다며, 숨을 쉬기 위해 다시 그에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비논리적이고 강박적인 호소를 반복하고 있다.
성장 과정 및 생활사
M의 어린 시절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갇힌 채 타인의 그림자만을 쫓아야 했던 시간의 연속이었다. 부모는 늘 바빴고, 그들이 집에 머물 때조차 M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기분을 실시간으로 스캔해야 했다.
M은 네 살 무렵, 가장 아끼던 인형이 망가졌을 때도 울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피곤한 아버지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그는 스스로 메뉴를 고르거나 옷을 선택해본 적이 거의 없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고, 자신의 주장은 곧 갈등의 씨앗이라고 학습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M의 연애는 늘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였다. 그는 자신을 강하게 통제하고 지시하는 상대를 운명적인 사랑으로 오인하며, 자신의 모든 통제권을 기꺼이 헌납했다.
주변인의 목소리 (1)
M의 고등학교 동창은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걔는 정말 착했어요.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빌려주고도 못 돌려받으면서 오히려 빌려 간 애가 미안해할까 봐 먼저 사과하던 애였죠. 친구들이 쟤는 착해서 시키면 다 해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착함이라기보다 선택지가 박탈된 사람의 무조건적인 순응이었던 것 같아요.
주변인의 목소리 (2)
사건 초기 M과 함께 일했던 전 직장 동료의 진술이다.
업무 능력은 나쁘지 않았어요. 시키는 건 정말 기계처럼 정확하게 해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마다 공황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다는 거예요. 아주 작은 서류 양식 하나 바꾸는 것도 윗사람의 허락 없이는 손도 못 댔죠. 나중에는 그 전세 사기 주범이라는 사람이 사무실 앞까지 찾아와서 모든 걸 결정해주는 걸 보고, 다들 쟤는 저 사람 없으면 숨도 못 쉬나 보다 하고 수군댔어요.
행동 관찰
내담자는 면담 내내 의자 끝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채, 언제라도 도망치거나 혹은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일어설 수 있는 긴장된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무릎 위에 놓인 치마 원단에 짙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거나 자신의 구두 끝만을 응시했다.
불안이 고조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입술 안쪽을 깨물어 피가 맺히게 했으며, 손가락 마디를 꺾는 소리가 조용한 상담실 안에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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