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스템이 가동을 멈추고 암전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복구의 기록.
이 이야기는 비난을 위한 기록이 아니다. 이 글은 책임을 묻기보다, 경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아도, 구조는 반복된다.
오전 열 시의 상담실은 햇살이 가장 깊숙이 침범하는 공간이지만, 오늘 내 앞에 앉은 내담자 K의 주변은 마치 빛조차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처럼 어둡다. 25년 동안 수많은 마음의 붕괴를 목격해왔지만, 모든 시스템이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암전된 상태를 마주할 때면 임상가인 나조차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낀다. K는 여기에 앉아 있지만, 그의 자아는 이미 아주 먼 곳으로 로그아웃해버린 듯하다.
텅 빈 눈동자, 미동도 없는 손가락, 그리고 생기 없는 피부색까지.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 전원이 차단되어 차갑게 식어가는 거대한 메인프레임에 가깝다. 나는 그를 깨우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암전된 방에서 억지로 불을 켜는 것은 때로 망막에 더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가 남긴 마지막 로그 기록들을 조용히 훑어보기 시작한다.
의뢰 사유 및 주호소
내담자 K는 극심한 무기력과 자살 사고를 주호소로 하여 응급 내원하였다. 최근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이후 약 3개월간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으며, 식사와 수면을 포함한 모든 기본적인 일상 루틴이 붕괴된 상태다. 가족들에 따르면 K는 어느 날부터인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질문에 대해 응답조차 하지 않는 함구 상태에 도달했다. 본 면담에서도 K는 질문에 대해 아주 미세한 고개의 움직임만으로 답하거나,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자아 소실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단편적인 메시지만을 필사적으로 송출하고 있다.
성장 과정 및 생활사
K는 전형적인 성취 중심적 가정에서 장남으로 자랐다. 그의 부모는 자녀의 감정적 안정보다 사회적 성공과 유능함을 가문의 보안 시스템으로 여겼다. K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고 타인의 운영체제에 맞춰 자신을 최적화해왔다.
초등학교 시절, K는 시험에서 하나를 틀렸다는 이유로 자신의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부모의 비난보다 자신의 시스템에 발생한 작은 오류를 견디지 못한 결과였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하며 겉으로는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늘 과부하 상태였으며, 자신의 번아웃 신호를 무시하고 도파민 회로를 쥐어짜며 가동을 이어갔다.
권고사직은 단순한 실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K의 자아를 지탱하던 유일한 인증 서버의 영구 폐쇄를 의미했다. 자신을 정의하던 사회적 역할이 사라지자, 그의 자아는 존재 근거를 잃고 급격히 암전되었다.
주변인의 목소리(1) 전 직장 동료의 진술
K 과장님은 정말 유능했어요. 24시간 내내 메신저가 켜져 있었고, 어떤 불가능한 요구도 다 해냈죠. 우리는 그가 철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오타가 잦아지고 회의 시간에 멍하니 허공만 보더라고요. 나중에는 말 한마디 없이 짐을 싸서 나갔는데, 그 뒷모습이 꼭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 같아서 다들 말조차 걸지 못했어요.
주변인의 목소리(2) K의 어머니 진술
말은 안 해도 속이 깊은 아이였어요.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고 늘 제가 시키는 대로 잘해주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라요. 방문을 열어보면 어둠 속에 그냥 앉아만 있어요. 밥을 줘도 안 먹고, 씻지도 않아요. 제가 얘를 말은 느린데 시키면 잘한다고 칭찬했던 게 잘못된 걸까요? 그게 착함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너지고 있었던 걸까요?
행동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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