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화면이 꺼진 날
그는 이름보다 먼저 공기를 밀어내며 들어왔다. 상담실 문이 열리는 찰나, 10평 남짓한 공간의 밀도가 한 톤 낮아졌다. 아니, 낮아졌다기보다 단단해졌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공기가 투명한 젤리처럼 굳어버리는 느낌. 25년 차 임상가의 피부는 미세한 기압 변화를 감지하는 기압계처럼 즉각 반응했다.
'아, 오늘은 공조기가 아니라 생존본능이 풀가동되는 날이구나' 하고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인간의 고통은 때로 물리적인 부피를 가진다. 그가 들고 들어온 고통은 방 안의 산소를 급격히 잡아먹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김지훈 씨(가명) 맞으시죠?"
가벼운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3밀리미터쯤 아래로 움직였다. 임상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내 눈에 그 각도는 '사회적 인사 수행 완료'를 뜻하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의 눈은 내 미간 어딘가를 아주 짧게 스치더니 곧바로 발등 근처의 허공으로 추락했다. 의자에 앉는 자세는 마치 0.3초 뒤에 도망쳐야 하는 초식동물과 같았다. 등을 등받이에 붙이지 않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발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자세. 언제든 박차고 나갈 준비가 된 몸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 지점에서 아주 익숙한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내 시야 상단에는 반투명한 상태창이 HUD(Head-Up Display)처럼 떠올라야 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낸 일종의 직업적 환각이자, 가장 강력한 진단 도구. 거기엔 다음과 같은 텍스트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곤 했다.
상태: 과각성(Hyper-arousal)
주요 방어기제: 회피(Avoidance) 및 정서적 격리
자율신경계: 교감신경 우세, 추정 심박수 110bpm 이상
그 화면을 보고 있으면 나는 폭풍우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베테랑 항해사가 된 기분이었다. 데이터로 치환된 인간의 고통은 다루기 쉬운 법이니까.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아무 것도 뜨지 않았다.
진짜로, 화면이 꺼졌다. 내 임상 소프트웨어가 단체로 파업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뇌 세포 어딘가의 회로가 타버린 걸까.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저기요, 제 눈앞에 상태창이 안 뜨는데 AS 좀 해주시겠어요?"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증기간은 이미 20년 전에 끝났다.
당황스러움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보았다. 안경도 고쳐 쓰고, 뇌를 재부팅하듯 눈을 세 번 연속으로 깜빡여봤다. 하지만 내 시야는 그저 투명하고 고요했다. 상태창이 뜨지 않는다는 것은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심야의 산길에 버려진 기분과 같았다. '지금 이 침묵은 저항인가, 아니면 탐색인가'를 숫자로 환산할 수 없게 되자,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이 순간적으로 40%쯤 배터리 부족 경고등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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