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코로나 위기단계가 가장 낮은 ‘관심’으로 하향 조정됐다. 인플루엔자 수준의 관리 단계라 코로나에 감염됐다 해도 하루 정도 격리 권고에 그치고, 병원 시설 마스크 의무 착용도 사라진다. 이제 ‘위드 코로나’라는 말조차 불필요한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4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은 전 세계,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세계백신연합(GAVI)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수는 690만~2,700만 명, 역사상 치명적 전염병 7위라고 한다. 우리가 전염병이라고 하면 중세시대 흑사병이나 페스트를 떠올렸듯, 후손들은 단박에 코로나를 언급할 것이다. 마스크 없는 외출은 범죄였으며 자리를 앉는 규칙이 있고 신분을 증명해야만 음식점 출입이 가능했던 시기, 마스크 구매를 위해 아이돌 콘서트 표 구할 때보다 더 빠른 클릭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병에 걸렸을 뿐인데 동선과 실명이 탈탈 털려 마녀사냥 당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코로나 환자가 슬금슬금 발생하던 2020년 2월, 나는 학습연구년을 마치고 전근 간 학교에서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병을 앓고 복직한 뒤로 과학 전담교사만 했던 터라 신규인 듯 잔뜩 긴장한 채 새 학교로 향했다. 첫 직원회의는 대면으로 진행됐고 나는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코로나가 점차 확산되고 있으니 개학 첫날 학생들의 위생에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 회의의 가장 큰 주제였다.
“책상은 한 줄씩 떨어뜨려 놓아야겠지요?”
“그렇게 하기는 해야 할 텐데, 학생 수가 28명이나 되니 문제네요. 양 옆과 뒷자리는 TV가 보이기나 할까 걱정이에요.”
같은 학년 다섯 명의 선생님들은 새 학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했지만 교실 크기, 학생 수가 정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그리 많지 않았다. 5년 만에 담임을 맡게 된 나는 더욱 머릿속이 복잡했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빴다. 어느 날 긴급회의에 다녀온 학년부장이 개학이 연기되었고 당분간 휴업이 이어질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4월에야 온라인 개학이 이뤄졌고 그 후 2년간 학교는 온라인과 등교 개학을 번갈아 하는 유래 없는 환경을 맞아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했던가. 코로나가 뇌리에서 사라져 가는 지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심지어 원격회의 플랫폼인 줌(ZOOM)에 입장할 때면 화면과 마이크 조절 버튼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세상에, 3년 전만 해도 호스트로 학생들을 초대하여 화상으로 능숙하게 수업했는데 지금은 음소거도 못해서 허둥대는 모습으로 퇴화하다니 시간의 흐름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아날로그 인간, 새로운 문물은 될 수 있으면 멀리하고 텍스트 정보를 선호하며 맨손 수업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선생이다. 그런 내가 마이크 달린 헤드셋을 쓰고 모니터 속 학생들의 잡담에 채팅으로 경고를 날리며 발표자와 자료를 자유자재로 바꿔 가며 온라인 수업을 운영하다니, 3년 전 모습이야말로 코로나시대를 버티기 위한 불가피한 변신이었던 셈이다.
온라인개학이 결정되고 교과서와 학습 꾸러미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대책은 또 어떻고. 800명이 넘는 인원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부장들은 학년별로 주도면밀하게 방문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각자 떨어진 구역에서 비밀요원처럼 마스크 속 눈빛만으로 은밀히 학년 반을 확인하고 교과서 보따리를 들고 말 한마디 없이 교문을 나서던 스산함이 새 학기 풍경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주어진 시간에 올 수 없는 가정은 교사가 집 앞에 꾸러미를 전달했다. 이런 배달은 코로나 확진으로 등교 중지된 친구들의 학습을 위해서도 종종 이어졌다. 이게 뭐라고 사람 없는 틈을 타 덩그러니 자료만 놓고 뒤돌아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교사인가, 택배 기사인가.’
어느 정도 컴퓨터 작동은 가능한 3학년을 맡은 덕분에 2020년 2학기부터 줌을 이용한 화상 수업을 병행했다. 첫날은 그야말로 ‘대 환장 파티’. 연결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전화하는 학부모(나도 초등교사일 뿐입니다), 화면을 켜라는데 자꾸 마이크를 켜둔 채 집안 대소사를 가족끼리 나누지 않나, 채팅으로 몇 시에 게임하자는 약속 정하기 바쁜 녀석들까지. 간신히 정리하고 수업 좀 하려면 동시에 튕겨져 나가 처음부터 되풀이···. 두 시간으로 예정됐던 수업을 한 시간 만에 끝내 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 학생들이 제법 자세를 갖춰 수업에 참여했다. 교실에 등교한 것처럼 정시에 접속하여 교과서를 펼친 채 나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몇몇은 여전히 자연인인 듯 우리를 맞았다. 누가 봐도 5분 전까지 자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까치집, 눈도 못 뜬 채 이름에 대답하는 목소리엔 잠이 가득하다.
“선생님, S가 속옷만 입고 있어요.”
“야, 너무했다. 그래도 나는 윗도리는 입었어. 너도 얼른 위만 입어.”
“···그, 그래 아무리 집이지만 옷은 입고 공부하자. 화면 끄고 얼른 옷 입어.”
화상 수업의 어려운 점은 참여 중인 학생은 물론이고 다른 가족 모두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를 줄 때 최대한 이름을 거론하기보다는 채팅 경고 정도로 그친다. 이미 S 복장의 불량함을 알고 있었지만 개인 채팅을 보내는 사이 한 친구의 고자질(?)로 만천하에 상태가 드러난 것이다. 할 수 없이 서둘러 환복을 요청했지만 S는 개의치 않았다. 되려 ‘아래위 세트’라며 패션 자랑을 하다 엄마에게 끌려가 옷을 갖춰 입은 뒤 돌아왔다. 이처럼 화상수업은 별일이 다 벌어졌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며 인터넷 공간에서 모둠 활동이 가능해질 정도로 새로운 형식의 수업에 익숙해졌다.
코로나시대는 내 생애 가장 많은 문자와 통화를 주고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자가진단 검사 결과, 온라인 학습터 출석 점검, 과제 확인과 피드백,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 학부모에게 알리고 확인하기 등등 하루에 백 건은 족히 넘는 연락이 이어졌더랬다.
개인 번호 공개나 근무시간 외 연락을 외면할 수 없는 비상상황이었지만 감정 섞인 연락에 여과 없이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대면으로만 이어지는 메마른 관계, 공감할 활동도 계기도 없는 상태에서 비상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칼날 같은 문자가 쏟아졌다. 예컨대 학교 내 감염자 발생으로 갑자기 등교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거나, 학급 내 의심 증상을 보이는 학생이라도 생기면 통화나 문자는 여지없이 살벌해졌다. 누구의 탓도 아닌데 책임을 따지고 신상을 추궁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감정이 지쳐갈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 곁에서 코로나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삶 전 영역을 뒤 흔들던 막강함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교육현장 역시 코로나 파편을 찾아보기 힘들다. 구석에 꺼진 채 방치돼 있는 발열측정기, 반마다 설치된 웹캠, 온라인 알림장의 상설화 정도가 흔적이라면 흔적이랄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흔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유치원과 초등 1, 2학년 시기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친구들의 사회성 발달은 눈에 띄게 저조하다. 맨 얼굴로 만나는 세상이 두려운 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새벽, 한밤중을 가리지 않고 문자를 보내는 학부모의 숫자도 급증했다.
상처가 치료돼도 흔적이 사라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겠지. 얼마 남지 않은 교사생활 동안 이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