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9. 침략자 A의 참회록

어머니, 다음 생에는 잡초로 뵙겠습니다

by 구십구 퍼센트 E

tvN 드라마 로케이션 담당자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순례자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침략자였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오늘도 보그체와 판교어가 난무하는 일상에서 지쳐가던 중 옆에 있던 직원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잠들어있던 뇌 회로를 활성화시켰다.

"매니저님, 저희 엄마가 가꾼 정원이 좀 예쁘긴 한데... 이번에 tvN 드라마 로케이션 담당자가 왔다 갔대요. 메인 촬영지로 나올 수도 있다더라고요."

그 순간, 내 눈은 평소보다 네 배는 커졌다. 아니, 정확히는 내 안의 'K-드라마 덕후' 자아가 단숨에 깨어나 눈꺼풀을 강제로 확장시켰다. tvN이라니! 미장센과 치명적인 영상미의 성지가 내 동료의 고향 집이 될 수도 있다니! 나는 평소 백화점 프로모션을 기획할 때보다 훨씬 기민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가쉬! (이런 언어를 무심코 사용하는 내가 싫지만 뭐 어떠랴) 나 너무 가고 싶어! 우리 가도 돼?"라며 눈을 빛내는 상사를 마다할 직원은 40대 중에는 드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백화점 정기 휴점일을 끼워 넣은 치밀한 '1박 2일 워크숍' 계획이 수립되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스친 미묘한 당혹감을 나는 '수줍은 환대'로 멋대로 해석했다. 그렇게 나(매니저)와 부매니저라는, 직장 생활의 거대한 '상사 원투펀치'가 전남 강진군의 고요한 정원을 향해 침공을 시작했다.

며칠 후, 우리는 퇴근과 동시에 '매니저'와 '부매니저'라는 육중한 갑옷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몸에 밴 '보그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속버스터미널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우리는 이번 여정의 '무드(Mood)'와 '바이브(Vibe)'를 논했다.

190분간의 질주 끝에 마주한 강진의 정원은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세상에. 그건 정원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였다. 조경 전문가가 설계한 인위적인 미학이 아니라, 한 인간이 수십 년간 흙과 싸우고 타협하며 일궈낸 집념의 박물관이었다.

"매니저님, 여기가 저희 엄마 정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피로가 섞여 있었다. 나는 감탄을 쏟아냈다. "세상에, 이건 모네의 지베르니보다 더 드라마틱해!" 하지만 내가 감탄하는 동안, 내 무의식 한구석에서는 서늘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매일 아침 허리를 굽히고 잡초의 목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노동의 주인공은 '딸의 상사'들을 위해 또 다른 중노동을 준비하고 계셨다.

참극은 식탁에서 정점에 달했다. 노릇하게 익은 장어와 삼겹살, 그리고 명장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온갖 밑반찬들과 천연 발효 장의 향연. 그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내 딸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 인간들에게 구박받지 않기를 바라는 한 어머니의 절박한 '외교 안보 전략'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스몰 사이즈에 몸을 집어넣어야 하는 직업적 비애로 인해 쪼그라든 나의 위장은 이번 시즌 초미니 클러치백보다 작았다. 장어 몇 점과 삼겹살 쌈 서너 개에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 너무 맛있는데 배가 불러서..."를 내뱉는 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식이 맛이 없나? 우리 딸 내일부터 직장에서 큰일 나는 거 아냐?'라는 근심이 장어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런데 어머니, 정원이 너무 예뻐요!"라고 지껄였지만, 사실 나는 그 식탁 위에서 가장 잔인한 빌런이었다. 딸의 휴일을 뺏고, 어머니의 허리를 굽히게 했으며, 정성껏 차린 음식을 남기는 무례까지 범한, 아주 대단한 침략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미래의 K-드라마 성지를 순례하러 온 순례자가 아니라 소중한 딸의 휴일을 강탈하고 어머니의 체력을 털어버린 '지독한 빌런'이었다는 것을. 뉘앙스를 감별하기는커녕, 상황 파악조차 못 한 채 타인의 고귀한 노동을 '관람'한 나의 천진난만함이 얼마나 무례했던가.

나는 이 글을 빌려 강진의 어머니께 뒤늦은 석고대죄를 올린다. 그리고 염치없게도 하나의 소원을 덧붙인다. 부디 다음 생에는 강진군 정원의 이름 모를 잡초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그날의 무례함만큼 어머니의 서슬 퍼런 호미질에 사정없이 응징당하며, 장어 한 점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이 비루한 몸뚱이를 처절하게 참회할 운명을 '하사'해 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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