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 갓생라이팅

ENFJ라는 멈추지 않는 경주마 (혹은 토끼)

by 구십구 퍼센트 E

(※ 일러두기 : 이 글은 세상의 모든 정의로운 ENFJ를 매도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그저 '자아가 유독 비대한' 한 마리 토끼(접니다)에 대한 임상 보고서일 뿐입니다.)


주토피아 2의 막이 오르고, 화면 가득 화려한 카레이싱 장면이 펼쳐질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관객이었다. 하지만 주인공 주디 홉스가 운전대를 잡고, 물리 법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무모할 정도의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을 때, 내 안의 ‘뉘앙스 소믈리에’가 위험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제발, 주디! 닉 말 좀 들어! 저건 열정이 아니라 그냥 민폐라고!'

나는 스크린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주디는 너무나 막무가내였고, 지나치게 긍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주변의 합리적인 만류(닉 와일드의 그 절실한 눈빛!)를 '정의 실현을 방해하는 소음' 정도로 치부하며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저 토끼는 대체 왜 저러나, 저 정도면 병이 아닌가 싶어 혀를 차던 순간,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영화가 끝나고 황급히 검색해 본 그녀의 MBTI.


ENFJ: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그 글자를 마주한 순간, 입안에 남은 팝콘이 모래알처럼 까슬거렸다. 아, 그랬구나. 주디가 그토록 대책 없이 밝았던 이유, 닉의 합리적 의심을 무시하고 "하면 된다!"를 외치며 벽에 들이받았던 이유. 그것은 그녀의 혈관 속에 나랑 똑같은 열정 과잉의 DNA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9시, 지하철의 무보수 보안관

나의 하루는 지하철 2호선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 시작된다. 건장한 젊은 남자가 거기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주디 홉스가 호루라기를 분다. 그리고 황급히 주변에 임산부가 없는지 눈으로 주변을 훑어댄다. 마침 한 분이 서있다. 잘 걸렸다 싶어, 핑크색 의자에 앉은 남자에게 "저기요, 여기 임산부석인데요."

옆에 임산부에게는 친절하게 웃으며 "여기 앉으세요."

남자가 당황하며 일어설 때 내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그 뜨거운 '도덕적 우월감'. 하지만 냉정히 말해, 나는 그저 내 아침의 무료함을 타인을 심판하는 쾌락으로 달랬을 뿐이다. 그 남자가 밤샘 근무를 마친 환자였을지, 다리가 부러질 듯 아픈 상태였을지는 내 '정의의 필터'에 걸러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옳다는 확신에 찬, 가장 피곤한 종류의 승객이다. 남편은 이걸 정의 중독이라고 부른다.


오전 11시, 열정과잉 독재자의 갓생라이팅

매장에 들어서면 나는 'D&I(다양성과 포용성)'의 전도사로 변신한다. 직원들에게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라"라고 훈수를 두면서, 정작 나는 그들의 일상을 내 기준대로 재단한다. 이미 매장 업무만으로도 영혼이 가출한 직원들에게 읽으면 도움이 될 거라며 책을 들이밀고, 올해가 다 갔다며 남은 99일 챌린지 계획표를 내라는 강요를 퍼붓는다. 심지어 그들의 목표도 내가 재단한다. 이 목표는 건설적이네요, 통과! 어머, 이건 뭐예요? 다시!

나의 '갓생'이 그들에게는 '갓(God)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모른 척한다. 나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성장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다양성'이나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낼 포용성'은 내 사전에서 가차 없이 삭제해 버렸다. 나의 정의감은 그렇게 타인의 일상을 침략하는 깃발이 되었다.

나의 위선은 '가짜 권한 위임'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번 회식을 앞두고 나는 부매니저에게 아주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부매니저님이 장소 섭외하고 예약 좀 해주세요." 그것은 마치 직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민주적인 리더의 제스처 같았다.

하지만 부매니저가 스마트폰을 꺼내기도 전에, 참을성 없는 내 안의 독재자가 튀어나왔다. "아니다, 잠깐만요. 지난번에 제가 갔던 데가 우리 회식 장소로 딱이에요. 거기로 합시다." 결국 내가 정하는 결말.

상대의 선택권은 나의 '더 나은 선택'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유효한 시한부 권리였던 것이다.


오후 8시, 공감 과잉과 공감 결여의 기묘한 동거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공감할 의무가 있는 남편이 있다. 타인의 감정에 누구보다 민감하다는 '공감의 대명사' ENFJ인 나는, 철저히 논리적인 T 성향의 남편에게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며 투덜댄다.

나는 남편에게 F의 공감을 강요하면서, 정작 논리로 세상을 보는 남편의 방식(T)은 전혀 공감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너를 위해 애쓰는데, 너는 왜 그대로야?"라는 나의 질문은 사실 질문이 아니라 '유죄 판결'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고, 내 방식의 감정 표현만을 정답이라 우긴다. 주디 홉스가 닉에게 입마개를 씌우려 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남편의 입술에 '나의 언어'를 강제로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F인 내가 T인 자기에게 공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냐는 T스러운 남편의 말에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린다.


나는 내일도 직원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눈치를 주고, 지하철 임산부석의 불청객을 심판하며, 남편에게 공감을 구걸할 것이다. 원래 자아가 비대한 토끼는 반성은 해도, 멈추는 법은 모르는 법이니까. 자, 이제 이 글을 다 읽었으니 당신도 2026년을 어떻게 ‘갓생’으로 채울지 새해 계획표나 짜러 가시라. 설날이 있는 2월이 진정한 새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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