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거슬리지 않기
타국 생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나의 언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아닐까? 대형 백화점의 은밀한 퍼스널 쇼퍼 공간, 브랜드의 명운을 건 VIP 초대회가 열리는 화려한 장소에서 나는 이런 행복한 기분이 산산조각 나는 현장을 목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손에 든 언어라는 오함마(大ハンマー)로 그 순간을 직접 박살 냈다.
행사장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대표님의 시선은 매장 구석구석을 레이저처럼 훑고 있었고, 나는 그 '하이엔드 한' 공기 속에서 누구보다 유능한 '프로페셔널'로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때 내 레이더에 포착된 건 아주 신중한 일본인 부부였다. 백화점 VIP를 모신 자리였기에 우리 브랜드가 초면인 고객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우주선 설계도라도 검토하듯 가죽의 결을 살피며 일본어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배경'이자 '무생물', 혹은 니혼고(日本語)라고는 '스미마센'밖에 모를 것 같은 한국인 직원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라는 완벽한 방패 뒤에서 아주 안심하며 "아까 그 브라운 컬러는 어디 있지?"라고 소곤거렸다.
평소라면 '아노~(あの…)'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겠지만, 당시의 나는 내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마치 닌자처럼 나타나 아주 유창하고 매끄러운 일본어로 그들의 대화 한복판을 베고 들어갔다.
"여기 말씀하신 브라운, 준비되어 있습니다(お探しの ブラウン、お持ちいたしましたので。)."
그 순간, 행사장 안의 공기는 마치 액체 질소를 맞은 듯 순식간에 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부부의 표정은 마치 토스터기에서 식빵 대신 살아있는 개구리가 튀어나온 것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친절하고자 했던 나의 기민함은 그들의 사생활을 무단 점거한 언어적 가택 침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 그들은 마치 국가 기밀을 공유하는 스파이들처럼 한마디도 들리지 않게 더 낮게, 더 은밀하게 소곤거리며 나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그 거리 두기를 감지한 것은 다행스럽게도(?) 나 한 사람이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서비스의 메커니즘'에 대한 아주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과연 최고의 서비스란 무엇인가? 나는 깨달았다. 서비스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심리적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공기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공기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가 숨을 쉴 때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건 이미 미세먼지 거나 오염된 공기일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장에서 일종의 '주파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객의 '채널'에 나를 맞춘다.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고객에게는 모든 기억력을 동원해서 그동안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를 복기하고 그들의 반려견 안부까지 묻는다. 반대로, 익명으로 대해주길 원하는 고객에게는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군다.
결국, 최고의 서비스는 고객이 나를 '유능한 직원'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쇼핑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그들이 “정말 거슬림 없이 편안한 시간이었어"라고 느끼게 하는 것. 내가 거기 있었는지조차 잊게 만들 만큼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는 것.
그 사건 이후로 일본인 고객이 오면 가장 먼저 정중하게 예고의 '잽'을 날린다.
"저는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오키가루니(お気軽に,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것이 내가 배운, 들리는 언어 뒤에 숨은 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키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