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로그 02

코바늘로 뜬 크롭 반팔 스웨터

by Pink Brown

스웨터라고 하기에는 약간 판초 같기도 하고, 판초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롭 길이인 이 스웨터는 하나의 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손으로 염색한 핸드다잉얀. 살구색과 베이지, 아이보리와 약간의 핑크가 뒤섞인 란셀린 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레이스 두께의 뜨개실. 무엇을 만들지 목적도 없이 그냥 순수하게 예뻐서 샀다. 택배를 뜯고 와 이뻐, 하고 감탄한 후, 한쪽 구석에 묵혀져 있다가 아직은 더웠던 지난 어느 9월 날, 아이보리색 몽실몽실한 로바울 튜브 실이 내 눈에 들어오면서 이 실이 소환되었다. 아이보리색 튜브실과 란셀린 1합으로만 섞기에는 너무 색이 부족한 느낌이 들어, 또 한 구석에 조용히 박혀있던 흙의 시간이라는 비슷한 톤의 핸드다잉얀과 함께 3개 실을 합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코바늘은 숭덩숭덩 뜨기 좋은 8호 코바늘로 골랐다. 목둘레를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왜냐하면 시작 사슬을 잡을 때 길이와 한두 단 뜨고 나서의 길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하긴 했는데, 한참을 뜨고 나서야 목둘레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너무 많이 와 버렸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지금까지 자라온 편물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 그냥 한번 가보지 뭐. 나의 뜨개는 하다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예쁜 실을 사용했다는 마음의 켕김만 잘 넘기면 아무 문제없을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목에서 가슴까지의 늘림 부분이 끝나고 소매 분리를 하고 나자 이제 몸통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똑같이 둘러둘러 떠가면서 길이를 늘여나가는 구간. 마치 이 아이는 언제나 크려나 하며 아기를 키우던 시기가 생각나는 구간이다. (남의 아이는 빨리 크는데, 내 아이는 그렇게 느리게 클 수가 없다). 위기가 찾아왔다. 몸통 부분과 소매 부분이 나에게는 취약 구간이다. (취약 구간이 전체 편물 중 2/3라는 사실...) 어떻게 어떻게 미루고, 하다가 졸고, 하다가 누워버리고 하면서 몸통 구간을 겨우 크롭으로 입을 수 있을 만큼 늘려냈다. 이제 남은 것은 너무나도 넓은 목둘레였다. 하나 더 작은 호수의 코바늘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직전에 유튜브에서 배운 코바늘 편물에서 고무단 넣는 방법을 활용하여 목둘레를 2~3센티 두께로 둘러주었다. 아, 이제 좀 봐줄만한 것 같다. 몸통 길이를 조금만 더 길게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구간을 통과할 수 없었다. 소매를 조금 더 둘러서 7부라도 되게 내려주면 좋았겠지만 그 구간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하아아아... 다 핑계이다. 그저 어서 완성이라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을 뿐. 남방이나 하얀 면티를 입고 그 위에 덧입으면 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다. 입으려면 한 번은 손으로 빨아서 입어야 하는데,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보루, 손빨래 구간이다.


아직 손빨래를 하지 못했다. 이번 주말에는 할 수 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다. 봄에 만든 조끼도 아직까지 손빨래를 하지 못한 것이 있는걸. 그래도 해야지. 그래야 입을 수 있다. (코를 가지런히 정리하려면 처음에 한 번은 세탁을 해야 한다) 손빨래해봐서 수축이 심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빨래망에 넣어서 용감하게 세탁기에 돌려볼 예정이다. 엄청나게 위아래로 줄어들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크롭인데...) 흠,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일 것이다. 어쨌든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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