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공지]
프롤로그 마지막 회차입니다.
2월 28일 토요일에 작가의 말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대체 뭐야?”
연경은 휘적휘적 인파를 헤치고 해운에게 다가왔다. 같은 학교 친구를 의식불명으로 만들어놓고도 태연자약한 아들이 기가 막힌 듯 연경이 실소했다. 해운의 가슴을 밀치는 연경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넌 정말로, 날 죽일 작정이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이야!”
해운은 말없이 연경이 밀어붙이는 대로 밀려 나갔다. 상대의 심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건 엄마나 자신이나 피차일반이었다. 딱 한 번이었다. 한 번 머리를 쳤을 뿐인데 수열은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엄마의 외침은 아득하게만 들렸다. 자신을 만류하던 어른들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리 의식을 잃었다고 해도 지수열은 끝까지 고통받아야 마땅했다. 학생부실 문이 열렸다. 해운의 새 담임교사가 걸어 나와 연경을 맞이했다. 구경 나온 학생들은 시작종이 울리자 뿔뿔이 흩어졌고, 해운은 엄마의 뒤를 따라 학생부실로 들어갔다. 해운은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보았다. 분명 자신은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에 마음이 편했다. 해운은 고개만은 꼿꼿하게 들고 지수열의 부모님과 마주하기로 했다.
지수열의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신 조부모를 떠올리게 했다. 해운은 두 노인의 백발과 수심 어린 주름을 보며 지수열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들은 어쩌면 소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경이 두 노인 앞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엄마…”
해운의 등을 짚은 연경의 손에 힘이 실렸다. 굴욕적인 상황에 후회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해운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탓에, 귀한 댁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요. 무슨 처벌이든 저희 아이는 전부 달게 받을 겁니다.”
“처벌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수열의 어머니가 말하길, 연경과 해운을 만나기 전에 몇몇 아이들의 진술을 전달받았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자그마치 3년이더군요. 그 녀석이 댁의 아이를 집요하게 괴롭혀 온 게. 한 때 그 아이의 부모였던 입장으로서 뒤늦게 알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수열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비겁하다 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자식이 없어요. 그래도 피붙이니, 마음을 고쳐먹고 아이를 감싸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더군요.”
늙은 남자가 해운의 손을 잡았다. 말라비틀어진 손이었지만 해운은 덫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나와 집사람의 방만함이 학생의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정말 미안하구나.”
매우 지친 얼굴로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악몽이 끝났구나. 이제야…”
망연자실한 연경 옆에서 해운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상황에 해운은 형용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중학생 시절, 차라리 지수열이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던 그날. 소각장 뒤편엔 지수열과 자신, 단 둘뿐이었다. 지수열은 둘만의 비밀을 만들었다며 킬킬거렸지만, 해운은 지수열이 그 일을 무용담처럼 떠벌리지는 않을까 항상 불안에 떨며 지냈다. 지수열 패거리는 뿔뿔이 다른 고등학교로 흩어졌다. 그래서 해운은 진술한 아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 아이들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까지 나왔기에 이 두 노인이 이렇게 황당하게 나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면 눈앞의 어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뼈마디가 앙상한 노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해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노인은 해운의 퇴학 처분을 반대했다. 해운이 두 주일 동안의 봉사활동과 일주일 정학 처분을 받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다소 가벼운 처벌에 학교는 한동안 어수선했다. 지수열을 두려워하던 아이, 해운과 친분이 있는 아이, 해운의 과격한 방식을 비난하는 아이, 해운이 여자에 미친 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아이, 사건에 그리 관심이 없는 아이 모두 해운의 처분에 반감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한 치의 검열도 없이 얄팍한 가정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송예림만 아니었어도, 신해운이 그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어.’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어?”
계절도 시간도 장소도 해운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예림의 질문만 선명히 남았다. 언제나 바라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송예림이 그런 바람을 평소 품고 있었다는 게 달갑지 않았고,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모습이 건방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 멍해져. 여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은 들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혹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까. 아니,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게 맞긴 한 걸까.”
해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실없는 헛기침으로 모면했다. 그는 예림을 요모조모 살폈다. 높은 콧대와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 곧게 뻗은 팔다리. 완벽한 외모의 여자애가 세상 운운하는 작태가 참으로 우스웠다.
뭐가 그리 불안해? 뭐가 두려운데? 너는 다 가졌잖아.
예림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해운은 그 작은 머릿속을 속속들이 알고 싶진 않았다. 해운은 예림을 좋아했다. 끌어안으면 금세 조용해지는 점과 어깨에 매달린 가벼운 두 손이 송예림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정학 기간 도중 예림에게 연락이 왔다. 해운은 필요한 만큼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예림의 앞에 서서 코트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손 한 번 떨지 않는 자기 모습에 조소가 나왔다.
도미윤에게 자신의 과거에 관해 들었어도 예림은 개의치 않았다고 들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지수열이지 해운이 아니라고 받아 쳤다고 했던가. 예림이 타인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예림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외면은커녕 세상에 환대받는 존재면서,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언제나 맑은 얼굴을 하고 한낮의 교정을 거닐던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속을 들쑤셔 놓았다. 첫 연애를 하면서 해운은 미처 몰랐던 자기 능력을 발견했다. 포기가 그 무엇보다 쉬웠다. 죄책감을 습관처럼 갖는 일보다 개운한 일이었다.
해운은 내의를 걷어 올려 예림에게 끝끝내 감추고 싶었던 몸을 드러냈다. 모든 치부를 드러낼 의도는 없었다. 처음부터 수열에게 구타당했던 흔적들만을 보여줄 심산이었다. 담뱃불로 지져진 자국을 예림은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제 그만해.”
“이 상처들보다 더 흉측한 진실을 알게 되어도, 넌 끝까지 날 위해 입바른 말만 할 수 있을까?”
“그만해. 제발.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해운은 예림의 손을 잡고 과거로 이끌었다.
“눈 돌리지 말고 계속 봐줘. 하나하나 전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해…”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예림이 흐느꼈다. 해운은 벽돌을 들게 만든 자신의 절망과 의지를 깡그리 잊었다. 송예림이야말로 자신이 벽돌을 들게 만든 원흉이라 굳게 믿었다. 그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욕실 불을 꺼놓고 숨죽여 울던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된 예림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감정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 먼저 건드린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일만큼 슬픈 일이 어디에 있을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슬픔으로, 해운은 예림을 어두운 욕실에 두고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예림이 제힘으로 문을 열고 나올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해운은 영영 가늠할 수 없었다. 예림이 겨울 산속에 묻은 죄악감의 깊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