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5화. 한순간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해운은 더 이상 예림을 찾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가 욕실에 처박혔던 과거를 난도질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욕조에 차오른 과거의 피를 동력 삼아 해운은 겨울 방학을 버텼다. 해운이 자기를 얼마나 몰아세우든 상관없이 민채와 연경의 저녁 모임은 계속 이어졌다. 해운의 원망스러운 눈길이 하연경을 향했다. 식기가 조금씩 밀려 나가 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상을 메운 안주 틈바구니에 자식들을 밀어 넣고, 입맛대로 즐기는 모임을 언제까지 가질 참인가. 엄마는 아들을 이해할 의사가 없었다. 가족의 손길에도 진저리 치는 아들 앞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서운한 티만 내는 거라면, 엄마는 앞으로도 아들이 필사적으로 감춘 흉터는 짐작도 못 할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아들에게 무지한 만큼 상처받을 것이다. 해운은 목이 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해운을 연경이 붙잡아 억지로 앉혔다. 해운은 고문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던 농지거리가 시작되었다. 당신들은 김세지와 나를 언제까지 바보 취급할 거야? 나와 송예림은 인간 이하가 되었고, 그래서 끝장이 나버렸는데. 당신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해운은 토하고 싶어졌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김세지 걔는 여자 좋아하니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어른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른들의 얼굴에 넌더리가 난 해운은 분노를 명분으로 혀를 재차 놀렸다.

“걔, 여자 좋아한다고요.”

세지의 부친은 황급히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민채와 해운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던 연경은 부서에서 연락이 왔다며 자리를 비웠다. 연경의 남편도 취했을 땐 계란프라이를 먹어야 한다며 들기름을 꺼내러 갔다. 자리엔 민채와 해운만이 남았다. 얼어붙은 술자리에 홀로 폭탄을 떠안은 민채는 자작을 했다. 술잔을 비운 민채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해운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본인에게 들었어요.”


민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연경의 외침을 무시하고 남편이 빠트린 라이터와 지갑을 챙겨 나갔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퍼졌다. 해운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해운이 늘 품었던 바람대로, 두 부부의 모임은 오늘로 완전히 끝났다.

해운은 마침내 용기를 냈다. 개학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해운은 심호흡을 하고 세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민채는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한 톨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 눈빛에 해운은 몸을 움츠렸다.

“어쩌지? 세지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 있는데.”

면전에서 문이 굳게 닫히자 해운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아주머니는 항상 웃어 주실 줄 알았다. 그날 자식의 행패는 못 보았다는 듯 부모님은 평소처럼 자신을 대했다. 나희 또한 예림에 관한 화제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잔잔한 일상이 해운을 숨 막히게 했다. 해운은 연락이 닿지 않는 세지를 단념하고 예림을 불러냈다.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관계 중 하나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나에게 말해주기 싫다면… 괜찮아. 대신 어른들에게 알리자. 우린 아무 힘도 없으니까.”

예림은 무심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과학실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방안을 샅샅이 뒤져도 아빠의 유품은 나오지 않았다. 짐작되는 곳은 과학실이었지만 도저히 그 장소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상실감에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비어 있는 주머니 속을 더듬는 수밖에 없었다. 예림은 입을 감쳐물고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한기에 손마디가 시렸다. 해운이 운운하는 어른들이란 과연 누구일까? 성인이 될 때까지 조카를 맡겠다고 자처했으면서, 지금은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고모? 아내에게 큰소리치지 못해서 아내의 조카에게 화풀이하는 고모부? 예림의 곁에 있는 어른이라고 할만한 이들은 그 둘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건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털어놓는다면-“

“난 못 해.”

“알아. 네 심정. 하지만-“

“할 수 없다니까?”

예림은 캡모자를 고쳐 쓰고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 거짓말이 이렇게 얄궂은 방식으로 자기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일이 바쁘셔도 아실 건 아셔야 해.”


해운이 손을 뻗자 예림은 흠칫했다. 애정이 듬뿍 담긴 해운의 음성과 부드러운 눈길이 못마땅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예림은 패딩 지퍼를 절반쯤 내리고 목도리를 풀었다. 하얀 입김이 어둠 속으로 조각조각 흩어졌다. 예림은 바닥에 닿은 목도리 하단을 들어 올려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신해운은 뭘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구는 걸까? 불시에 벌어졌던 그 일을? 그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자신을? 해운의 다정한 온기가 닿자, 예림은 겨울 방학식 전날로 되돌아갔다. 대관절 그날 과학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 소년들의 행위를 기억해 보려는 시도 대신 자신에게 화살을 돌려야 숨이나마 쉴 수 있었다. 가혹한 자기합리화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자신의 상처를 해운은 만날 때마다 열어젖히려고 했다. 신해운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애인 줄은 몰랐다.


“…내가 알아서 해.”

“어서 하지 않으면-“

“날 건드리지 마!”

예림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해운의 손을 쳐냈다. 등줄기에 맺힌 식은땀이 사물사물 흘러내렸다. 나희가 불러내어 나갔던 자리엔 해운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들으려고 했던 해운을 떠올리자 부아가 치밀었다. 해운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 없었고, 들어주기도 싫었다. 애당초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연락을 받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뒤 예림은 해운을 떠났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하얀 울 목도리가 예림의 발자국을 흐릿하게 지워 놓았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든 봐. 이걸로 네 배를 쑤실 거야.’

파도처럼 밀려오고 사라지던 지수열. 검은 바닷물에 빠져 점점 가라앉던 자신.

‘쟤 방문을 열면 한바탕 난리가 나. 해운 아빠든 나든 그 누가 됐든 자기를 건드리는 게 싫대. 제발 내버려둬 달래.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허우적거리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더는 자신을 아들처럼 여기지 않을 아주머니.

“…애초에 네가 사귀지 않았으면 됐잖아.”

“날 건드리지 마!”


차오른 물은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했다. 마지막으로 쥐었던 예림의 손처럼. 해운은 세면대 속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이미 부패한 익사체와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을 광활한 바다에서 건져 줄 사람들은 자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온몸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혐오스러웠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야 마는 자신도 한심했지만,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지긋지긋했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해운은 거울 속에서 숨죽여 울던 과거를 마주했다. 손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해운이 주먹을 꽉 쥐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주먹이 매서운 속도로 앞을 향했지만, 정작 거울 속 얼굴과 가까워지자 맥아리 없이 표면에 닿았다. 과거를 끊임없이 죽인다고 끊어질 악연이 아니었다. 지수열과 자신,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끝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해운은 절대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그날 과학실 바닥에서 우연히 발견한 지포 라이터는 자신의 것과는 달리 밋밋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수열은 그 물건을 쓰레기통에 처박듯 원표은에게 넘겼다. 뒤처리까지 표은에게 맡기고 방으로 돌아온 뒤, 수열은 자신의 라이터가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그건 집을 나오기 전 훔친 물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가방과 옷을 탈탈 털었으나 깜찍한 보물은 나오지 않았다. 수열은 조용히 교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어도 지루한 나날이 되풀이되는 건 변함없었다. 문득 표은에게 넘긴 라이터가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기념품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니 이따 표은의 집에 쳐들어가서 빼앗기로 했다. 겨울 방학과 봄 방학, 그리고 새 학기까지. 두 달 동안 상실감을 맛보게 한 대가도 똑똑히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원표은의 망할 계획에 동참하지만 않았더라면 지포 라이터를 잃어버리는 일 따윈 없었다.


길고 긴 하품이 나왔다. 누군가를 두들겨 패고, 피를 보고 싶다는 욕구는 여전했지만, 저항 한 번 안 하는 표은을 패는 일도 이젠 신물이 났다. 수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 장난감은 없었다. 무심코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이 몸도 사물이라는 사실을 왜 지금에야 알게 되었을까. 자신도 파괴할 수 있었다. 하찮은 벌레들을 짓뭉개는 짓보다 벌레들에게 고통을 가하던 이 육체를 찢어보는 일도 시도해 봄 직했다.

머리를 쥐어짜던 지수열 앞에 신해운이 나타났다. 새빨간 얼굴을 한 채 수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커져버린 키만 제외한다면, 얻어 맞으면서도 울음을 참던 과거의 모습과 같았다. 수열은 원표은을 인정했다. 그가 나불대던 헛소리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수열이 마지막으로 본 인간은 머리 위로 붉은 벽돌을 치켜든 신해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