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4화. 드디어 막이 오르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민채와 연경의 가족이 모이는 금요일 저녁은 일종의 의례와 같았다. 저녁식사 뒤 이어지는 술자리는 세지와 해운이 어른들의 안줏거리가 되는 차례였다. 두 아이는 서로를 사돈이라 부르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어른들에게 질려서 거실로 나가 있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했다. 학교에서 계집애 같다는 말을 들은 날이었다. 해운은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어른들에게 들어야 했다. 세지가 듬직해서 해운은 걱정 없다는 연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눈엔 현관문을 꽝 닫고 나가는 해운의 뒷모습마저 계집애 같았다. 민채가 연경에게 찬물을 밀어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연경은 능청스럽게 맥주와 소주를 섞었다.


해운은 착잡한 기분으로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뒤따라 나온 세지의 태평한 얼굴을 보니 심술궂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속 편해서 좋겠다. 저런 소릴 듣고도 주스가 넘어가냐.”

“그건 혼자서 음료 4분의 3을 마신 네게 내가 할 말 아닐까?”

뭐라 되받아 칠 말이 없었다. 무릎을 굽혀 해운의 옆에 앉으며 세지가 말했다.

“우리 둘이 정신이 나가서 정말로 결혼하겠노라 나서면 몸서리칠 분들이야. 그냥 우릴 놀리는 게 어른들의 스포츠인 거지.”

경악에 물든 부모님의 얼굴과 뚝 끊길 금요일 모임을 생각하니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상상만으로 기분이 풀어지기엔 역부족이었다.

“…여자애 같다는 소리가 그렇게 기분이 나빠?”


무슨 당연할 소릴 하고 있느냐고, 해운은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어딘지 풀이 죽어 있는 세지의 모습에 덩달아 기운이 빠졌다. 자기가 세지에게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찝찝함 마저 들었다. 분명 조금 전 엄마의 짓궂은 말에도 넉살 좋게 웃는 애였는데. 어떤 이유로 기분이 나빠진 걸까 가늠하려는 찰나 세지가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어른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느지막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위를 쳐다보았다.

“부모님께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해운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만으로도 세지가 자신을 이해할 거라 믿었다. 불현듯 옷 안에 웅크린 상처들이 아렸다.



예림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있었다. 짬을 내어 오가던 메시지, 잠들기 전 나눴던 통화가 뚝 끊겼다. 해운은 연락처 목록에서 연나희를 찾았다. 연나희의 번호를 저장할 때 ‘예림친구’로 저장하는 바람에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텅 빈 메시지 화면에 내용을 입력하고 도중에 지우기를 반복했다. 연나희는 예림의 친구였지 자신의 친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나희는 극복할 의사가 없을 어색함에 대한 각오도 잠시, 해운은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 복도에서 마주쳤던 친구들과 교실에 있는 아이들 모두 야릇한 눈빛을 했다. 마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해운은 언짢아졌다. 몇몇 아이들이 해운에게 다가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운 내. 너 참 안 됐다. 어쩌다 그런 애한테 걸렸냐. 전혀 몰랐어. 송예림이 그런 애일 줄은. 영문 모를 말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해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들의 설명을 듣자마자 해운은 어처구니가 없어 폭소했다. 예림이 남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니? 오래전부터 지수열을 노리고 있었다고? 겨울 방학식 전날이 예림에게 적기였다고? 지수열 외에 다른 새끼들도 과학실에 있었고, 예림이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고? 해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교실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문에 휩쓸리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아이들마저 잔인해 보였다. 아이들의 집요한 관심에 역겨움을 느끼며, 해운은 그들이 흥미를 잃고 떠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 해운은 아이들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교실을 서둘러 떠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연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예림을 만나야 했다.



“그저 네 연락이 성가신 거 아냐? 네가 질린 거네. 아니면 소문이 사실이던지.”

“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해운이 부모님과 수열이 아닌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본 건 처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연나희가 예림에 관해 무정한 말을 내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림이네 주소가 왜 궁금하니? 애초에 걔가 너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 왜 나를 통해 알아내려 하는 건데? 향단이 입장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네?”

있는 힘껏 이기죽거리는 나희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불안이 가셨다. 나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아이도 분명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궁지에 몰린 강아지처럼 구는 듯했다. 해운은 나희의 공포를 십분 이해했지만,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다.


“도저히 연락할 수단이 없는데 그러면 어떡해. 지금 당장 물어 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걜 찾아가서 뭘 어쩔 건데.”

“당연한 걸 왜 물어? 예림이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겠어.”

“…애들이 지껄이는 걸 너도 들었지. 그 얘기를… 본인에게 확인하겠다고?”

해운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발밑의 자갈을 굴렸다. 의미 없는 입씨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연나희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을 땐 신발 밑창에 자갈이 끼어버린 후였다. 무시하기엔 제법 크고 뾰족한 녀석이었다.


“…애초에 네가 사귀지 않았으면 됐잖아.”

“뭐라고?”

“네가 그 애 곁에 있지만 않았어도, 보란 듯 그 애를 전시해 두지만 않았어도, 그런 소문이 돌 리 없잖아! 예림이가 지수열 같은 쓰레기를 좋아했다고? 어디서 그런 개소리가 나와! 내가 너였다면 아예 예림이랑 엮이지 않았을 거야. 다 네 잘못이야. 네가 처신을 잘했어야지!”

저 멀리 그네가 내는 스산한 소리가 해운의 귀에 박혀 들었다. 해운은 멍하니 나희의 붉은 눈시울을 바라보았다.

“송예림은 분명 널 보고 안도하겠지. 바보처럼.”

나희는 볼을 적시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휴대폰을 꺼냈다. 해운은 가방 속을 굴러다니던 휴대용 티슈를 마지못해 내밀었다. 다섯 번째 시도 끝에 예림과 겨우 통화가 됐다. 예림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해운을 노려보는 나희의 눈빛이 형형했다.

“어디 잘 해봐. 나쁜 새끼야.”


나희는 예림을 불러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해운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예림을 기다렸다. 곧 있으면 모습을 드러낼 예림이 지수열만큼이나 두려웠다. 예림은 자신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지만, 언뜻 보기에 평온해 보였다. 해운의 착각은 예림이 가로등 아래 멈춰 섰을 때 깨졌다. 조명 불빛을 받으며 예림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가 어깨를 떨며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자 두려움으로 뒤엉켜있던 해운의 머릿속이 일순 정리되었다.

나희가 옳았다. 자신의 연약함을 경멸하지 않았더라면, 수열을 향한 두려움을 순순히 인정했더라면, 자신이 변했다는 믿음과 그 증거를 예림에게서 찾지 않았더라면, 예림이 이렇게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해운은 행인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림이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지수열의 밑바닥이 참으로 끔찍했다. 그보다 저열한 건 자신의 오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