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3화. 어떤 죽음은 능란하고 정교하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협상에 실패한 걸까? 수열에게 머리털이 잡혔다. 표은은 수열이 시키는 대로 소파에 엎드렸다. 두피가 너무 아파 눈물이 났지만 얌전히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극을 이끌어갈 테니.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수열의 발이 서너 번은 옆구리에 날아오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잠잠했다. 표은은 놀라 일어나려고 했다. 수열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었다.

“얼굴은 안 된다고 했지?”

수열의 주먹이 표은보다 빨랐다. 수열의 분노가 한풀 꺾일 때까지 표은은 가만히 있었다. 안타깝게도 수열의 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다시 표은을 엎드리게 했다.

“예행연습은 하게 해줘야 공평하지.”

“너 정말로-.”


자신이 강간당하는 상황이라니. 그것도 동성에게. 표은은 폭소를 터뜨렸다. 얼굴과 소파 커버를 눈물로 적시며 웃고 또 웃었다. 난데없이 집에서, 지수열이라는 애송이의 분풀이 도구가 되는 순간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표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훔치고 팔로 소파를 문질렀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런 건 송예림 같은 여자애들이나 겪을 고통이 아닌가. 표은은 계속 새어 나오는 실소를 내버려두었다. 수열이 하체를 바싹 붙여왔다.

“넌 정말 기분 나쁜 새끼야.”

저토록 낮은 목소리라니, 기분이 제대로 잡친 게 분명했다.


표은은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얼굴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다. 숨이 막힌다. 인조 가죽과 오래된 먼지 냄새가 가시고, 바람과 토향과 이슥한 밤의 냄새가 몸에 퍼진다. 한밤중의 숲. 교교한 달빛과 두 소년의 땀방울로 채워진 숲. 스무 명의 사내가 은빛 비를 맞으며 눈을 빛낸다. 표은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사내들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버지의 미소를 본다. 아버지는 사내들의 손에 들린 칼을, 톱을, 망치를, 밧줄을 흐뭇하게 여긴다. 한가운데 여왕개미가 묶여 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듯 아버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테니까. 표은은 젖은 흙과 나뭇잎을 한가득 움켜쥔다. 헛소리. 지수열 이 새끼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사내들이 소년처럼 웃는다. 그들은 여왕개미를 해체한다. 수열의 후련한 한숨이 표은의 귀를 간지럽힌다. 수열은 행위를 끝내지만, 표은은 이제 멈출 수 없다. 빗속에서 분리되는 여왕의 몸을 붙잡을 수 없다. 여왕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고 커다란 턱이 딸깍거린다. 잘린 단면에서 흘러넘치는 피가 빗줄기와 만나 서늘한 불꽃이 된다. 표은은 은빛으로 반짝이던 아버지의 비옷을, 부엌에 서서 재료를 손질하던 엄마를, 엄마를 못 박히게 한 아버지의 쾌활한 음성을 떠올린다. 낯선 존재의 피를 묻히고 온 어린 아들을 보고 엄마는 아연실색한다. 엄마가 들고 있던 칼. 그 흠집에 낱낱이 스며들던 조명 불빛. 지나치게 명징했던 그날의 달빛. 지나치게 가늘었던 그날의 비.

수열이 가한 고통이 지나치다고 여기면서도, 표은은 오래 전 그날 밤이 지나친 밤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표은은 여왕의 몸이 우습다. 해체되는 가슴과 얼굴, 배와 다리가 하찮다. 여왕에겐 기억도 기록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왕에게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석연치 않다. 맘 놓고 이 참극을 즐길 수 없는 이유는 숲 한가운데 난자되고 있는 여왕개미가 여왕이면서, 실은 여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왕을 향한 경멸에서 표은은 믿음과 사랑만을 터득한다. 엄마의 무표정한 낯보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를 따라 숲속으로 가야 한다. 깊은 밤 마주친 사람들을 선량한 안내자로 여겨야 한다. 땅속의 뿌리보다 더 몸을 낮춰 그들을 향해 엎드려야 한다. 도륙의 현장에 가담하고 싶은 욕망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게 남자가 되어야 한다. 표은에게 수치심 따윈 없다.


여왕의 몸 틈새로 낯선 살결이 빛난다. 소녀가 여왕의 몸을 열고 기어 나온다. 달빛과 여왕의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사내들의 칼부림에도 소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난 표정이다. 소녀는 나른한 몸짓으로 여왕의 살점을 줍는다. 살점을 주워 냄새를 맡는 소녀의 눈꺼풀이 떨린다. 그것이 영혼의 깃털이라도 된다는 듯 뺨에 비빈다. 오로지 여왕을 향해 애도할 뿐, 폭력은 소녀에게 의미가 없다. 표은의 분노는 자연히 소녀를 향한다. 새까만 숲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존재를 굴복시킬 방법을 찾는다. 소녀가 미워 견딜 수 없다.

그러니 부디 너도 날 미워했으면.



예림은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엎드려 얼마나 잔 건지 두 팔이 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운 교실이었는데, 지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히터도 꺼져 있어서 오슬오슬했다. 자신을 깨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무리도 아니었다. 예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였다. 오늘 오전에 나희가 조퇴한 이후로 몇몇 성가신 남자애들을 빼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친구들은 전혀 없었다. 새삼 나희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년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 성싶었다. 나희를 따라 문과를 선택하고 선택과목도 똑같이 골라서 내년에도 그와 같은 반이 될 예정이지만, 나희의 부담을 줄여주지 않으면 분명 그의 수험생활이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예림은 가방을 싸고 외투를 입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교실은 마치 냉장고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젤리 같았다. 붉은색 과일 젤리를 상상하자 배가 고파졌다. 휴대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병원에 가니 스트레스성 위염이라 약을 받아왔다는 나희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예림은 해운의 문자도 확인해 보았다.


[나 과학실에 있어. 청소 중. 이쪽으로 와.]

약 반 시간 전에 온 메시지였다. 예림은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오른손엔 휴대폰을, 왼손엔 아빠의 지포 라이터를 쥐었다. 그동안 예림은 적어도 자신이 두 개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이라 믿었다. 적어도 한 개의 현실과 한 개의 허상, 그것도 아니라면 두 개의 허상 사이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피투성이 얼굴을 하얀 눈밭에 묻고 하염없이 죽음을 기다리다가도, 고개를 들면 해운과 나희가 자신의 손을 잡고 웃어주었다. 예림은 체념하고 싶어졌다. 이제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일어나, 달려오는 차량에 접근해 두 손을 흔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해운은 과학실에 없었다. 대신 낯선 남자애가 실험대에 앉아있었다.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애는 없었어?”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동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에 예림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소년은 말없이 휴대폰을 예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소년이 해운인 척하며 문자를 보냈음을 예림이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예림은 강렬한 생욕을 느꼈다. 나희나 해운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의지였다. 허상과 현실이 뒤섞인 예림의 세계에서, 이 순간만큼은 완전한 현실이었다. 당장 과학실에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낯선 소년 두 명이 더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지수열이 등장했다. 뒤이은 공포가 예림을 자리에 못 박히게 했다. 나희는 지수열을 기억하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앞문과 뒷문이 잠긴 지금, 자신의 기억력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수열이 손목을 움켜쥐자 예림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차량을 향해 도움을 구한 결과가 역사(轢死)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뒤엔 무슨 이야기가 뒤따를까.


저 멀리 달려오던 검은 승용차가 되려 속도를 올렸다. 차량이 내뿜는 전조등 불빛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필사적으로 자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모든 신경이 점점 가까워지는 죽음만을 맞이했다. 예림은 멍하니 창밖 풍경과 앙상한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은 도로에 순순히 번지는 피를 지켜보아야 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간혹 자신을 사로잡곤 했지만, 이런 식의 죽음을 원하던 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고통을 느낄 틈도 주지 않는 이런 죽음은. 어느새 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휴대폰 진동 소리도, 예림이 중얼거린 욕설도 소리 없이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