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식만큼 찌질한 새끼는 없었어. 키도 땅에 눌어붙은 꼴이었고 몸도 뻣뻣한 나무토막 같았다니까. 나중엔 주먹 한 번 휘두를 필요도 없이 알아서 기어다녔다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지금은 아주 살판 났어.”
수열이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가 하는 말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쯤이면 자기 침 냄새에 질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표은은 창문을 닫았다. 벌써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런 녀석에게 달라붙는 계집애야말로 골빈 년 아니냐?”
“아니, 걘 절대 골빈 애가 아닌데.”
“너도 걔 보니 꼴리긴 했나 보다?”
대꾸할 가치가 없었다.
“표은아,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셈이야?”
퍽 상냥한 말투로 수열이 물었다. 표은이 말이 없자 애가 달아오른 수열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와서 없던 얘기로 하자는 거면 가만 안 놔둔다. 난데없이 내 앞에 나타나 놓고는? 하,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 내 식대로, 내 입맛대로 요리해달라는 건 너였어. 그렇게만 해준다면 상상도 못 할 색다른 체험을 시켜주겠다고 했잖아?”
수열이 흉터가 잔뜩 남은 표은의 손등을 꾹꾹 눌렀다.
“설마 이까짓 흠 따위로 퉁치는 건 아니겠지?”
수열이 위압적으로 팔을 뻗어왔다. 그러나 자기 팔로 표은의 어깨를 감싸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바로 깨닫곤 능청스레 팔짱을 꼈다.
“대체 인내심 테스트를 언제까지 할 셈이냐고.”
표은은 뜸을 들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여는 척 연기했다.
“…네가 신해운에게 당하는 거야.”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너에게 사람이나 물건은 차이가 없어. 넌 파괴하는 일밖에 모르니까. 너는 그저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상스러운 욕이나 달고 살지. 발에 닿는 게 나무든 전신주든 쓰레기통이든 일단 걷어차고 봐. 너는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나는 알아. 너는 네가 그나마 잘했던 행위에도 질린 참이야. 타인의 신음과 비명을 듣는 일이 지루해 죽겠지? 나를 찌르고 찔러서 몸을 열어젖힌 뒤, 네 염증을 잠시나마 달랜들 무슨 소용이냐? 표은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비방을 억누르며 기꺼이 수열에게 멱살을 잡혀주었다.
“네가 신해운을 각별하게 여기는 건 알겠는데… 언제까지 대용품만 안고 있을 수는 없잖아?”
“말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말해.”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 신해운과 네 사이를 완전히.”
표은은 그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지옥도를 그리려 했다. 아니, 인간들 스스로 지옥도를 그려내게 하고 싶었다. 아둔하고 지극히 평범한 이들. 그들이 흩뿌릴 모멸과 분노와 혐오의 색들.
“신해운은 자기가 무결한 피해자라고 확신하겠지. 네 기분을 잡치게 했던 건 완전히 잊고서. 세상은 얼마든지 너를 가해자로, 신해운을 피해자로 결론 낼 수 있지. 네가 그 가능성을 뒤집고 신해운이 너를 공격하게 만들어. 제삼자가 너를 피해자로 여기도록. 어때? 한 번쯤은 네 마음에 드는 녀석에게 죽도록 맞아 보고, 선량한 약자 역할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말 그대로 색다른 놀이지.”
수열과 한 거래는 그 시작점이었다. 표은은 단순한 구타만이 수열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진작 눈치챘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촉망받는 신해운이 어째서 수열에 대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는지 납득이 갔다. 지옥의 밑그림은 수열의 손으로 그려져야 했다. 그가 적임자였다.
“너만 좋다면 신해운이 널 팰 구실은 내가 만들어 주지.”
집엔 이 멍청이와 자신, 둘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낮추는 편이 더 긴장되었다. 표은은 수열에게 귓속말로 계획을 들려주었다. 수열은 표은의 가슴팍을 치며 낄낄거렸지만, 당황한 기색을 전부 감추진 못했다.
“이거 나만 망하기 딱 좋은 일 아니냐?”
표은은 어릴 때 외진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마을 어른들이 한 주민을 소리 소문 없이 지워버렸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표은은 그 때 어떤 하찮은 인간이라도 자기가 가진 힘보다 더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이치를 배웠다. 세상엔 셀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있고, 그 대소사들은 어른들의 입맛에 따라 미담으로, 아니면 우발사고나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로 변했다. 우는 자가 웃는 자로, 웃는 자가 우는 자로 얼마든지 탈바꿈되었다. 당한 쪽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사건을 치부로 만들어버린 이들도 과거의 어른들이었고, 현재의 어른들이었다. 그러니 신해운이 입을 열지 않아 묻힌 지수열의 과거사와 앞으로 벌일 일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표은은 송예림 또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똑독히 알고 있는 아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때론 꼴통처럼 굴다가도, 출중한 외모만을 믿고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게 분명했다. 타인의 눈물과 피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권력자처럼, 자신을 향한 선망이나 욕망, 증오 따위는 송예림에게 언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각질에 불과했다. 새 학기가 시작한 뒤, 약 두 달 동안 틈나는 대로 관찰한 결과 송예림은 분명 그런 인간이었다. 표은은 알량한 주먹 하나만 믿고 설치는 깡패 자식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내가 말했지. 걘 골빈 애가 아니라고.”
수열은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 뚜껑이 열어젖혀질 때마다 표은의 눈엔 그것이 맥을 추리지 못하는 인간의 머리처럼 보였다. 수열의 낯짝에 비틀린 미소가 떠오르자 표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절대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지 마. 영상도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신해운 그 새끼도 여태 한 장도 남기지 못해서 더 열받는데.”
표은이 인내심을 가지고 재차 강조했다.
“조금이라도 빌미가 될 증거를 사서 만들면 안 돼. 그래야 네가 이 사건에서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
“그래, 그래. 네 말은 잘 알아 처들었어.”
수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가 뭔데 뭐가 되고 뭐가 안 된다 지랄이야?”
암만 별 볼 일 없을 인생이라지만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기를 자초하는 꼬락서니에 헛웃음이 나왔다. 수열이 눈썹을 꿈틀댔다.
“웃어? 웃지 마. 입 찢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사진이나 영상은 위험해. 너에게 좋을 게 없다니까?”
“됐고. 왜 그걸 네가 정하냐고. 기분 더럽게.”
한동안 두 소년은 팔을 맞댄 채 서로 노려보았다. 표은은 수열에게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는지 갈피를 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수열의 차가운 눈빛과 뜨거운 체온이 표은을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게 했다. 표은은 수열이 해운에게 가진 증오가 얼마나 조악하고 형편없는지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