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1화. 진실은 외면할 수 없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예림은 미윤과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네 말대로 내가 다 가진 애였다면, 연휴에 거지꼴을 한 너와 조우할 일은 결코 없었겠지. 이 비꼼도 육성으로 꺼내진 않았다. 딱히 배려는 아니었고,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림은 지갑을 열어 현금을 확인했다. 만 원 정도면 도미윤과 무의미한 대화를 더 이상 나누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인심 썼다. 내가 컵라면 값은 할게.”

미윤이 눈을 빛내며 덥석 손을 잡아 왔다. 이기죽거리는 걸 보니 또 남의 험담을 시작할 기세였다. 예림은 미윤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상황을 곤혹스럽게 여긴다는 의사는 표현하고 싶어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알아? 신해운, 중학교 때랑 지금이랑 완전 딴판이야. 걔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해운의 과거를 전부 쏟아내고 나서야 미윤은 예림을 놓아주었다. 예림은 인제 미윤을 향한 경멸심을 숨길 수 없었다. 미윤이 바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신해운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줄 몰랐다며 울음이라도 터뜨리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라이벌에게서 쟁취한 트로피가 알고 보니 하자품이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길 바라는 걸까? 돈을 건네면 미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꼴이 되지 않을까 잠시나마 망설였던 게 후회되었다.

“...근처에 세영미용실이라고 있어. 오늘 문 열었더라. 거기 커트 잘 해.”

예림은 미윤의 손에 만 원을 쥐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휴 잘 보내.”

이 말은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나. 예림은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뒤에서 미윤의 외침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퍽 애달프게 들려서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걔랑 계속 사귀기라도 할 거야?”

“일단은.”

“...야,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냐?”

미윤이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어서 예림은 말문이 막혔다. 신해운에 관한 험담이 진정 컵라면의 대가였을까. 어디서부터 대화가 엇나가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예림은 정론으로 맞섰다.

“그건 지수열의 잘못이지, 해운이의 잘못이 아니잖아?”


“가식 떨지 마. 남자라면 환장하는 주제에.”

상대에게서 먼저 달아나려고 했던 쪽은 예림이었지만, 마지막에 상대를 남겨두고 떠난 이는 미윤이 되었다. 예림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윤이 있었던 파라솔 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널린 컵라면 용기와 빈 컵을 치우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군것질이 당겨 청포도맛 사탕 한 봉지를 계산했다. 사탕 하나를 입에 넣고 미윤이 사라진 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미윤과 가까워질 일은 없을 테지만, 적어도 그가 남은 연휴를 잘 보내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냉장고 문을 여니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연휴 전 부친 전이 있었다. 전을 접시에 담아 전자렌지에 돌렸다. 아주머니의 솜씨는 정말 좋았다. 특히 동태전이 맛있었다. 얼핏 아주머니께 외동아들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애는 매년 이런 걸 먹겠구나 싶어 괜히 부러워졌다. 설거지를 마칠 무렵 문득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예림이 몸을 홱 돌렸다. 아무도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일었다.

오래된 공포영화의 희끄무레한 유령처럼 예림의 두 발이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층계참에서 우뚝 멈춰 선 예림은 그 자리에 절퍼덕 주저앉아 무릎을 모았다. 새하얀 벽에 등을 기댄 채, 해운의 문자메시지를 다 읽고 성의 있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미윤이 들려준 이야기는 오늘 그와 조우한 일만큼이나 충격이었다. 매사 자신만만한 태도의 신해운과 상처입어 움츠린 왜소한 꼬마를 어느 누가 동일 인물로 볼 수 있겠는가. 미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해운이 은연 중 드러냈던 강박의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해운은 3년 동안 겪은 괴롭힘을 아예 없는 일 취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에 관해 수시로 물었던 거구나. 내가 네 중학교 시절을 궁금해 할까봐. 내가 절대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해운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질문에 계속 이야기를 지어내다 보면 그 허구가 사실이 된 것 같아 오히려 기뻤다. 적어도 거짓말하는 순간엔 그리운 집의 냄새와 엄마 아빠의 품을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덩달아 뇌리를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예림은 급히 버튼을 눌러 문자메시지함을 확인했다. 오늘 나희와 주고받은 문자가 단 한 통도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연휴엔 꼬박꼬박 연락을 주고받곤 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나희와 새벽 내내 메신저가 불타도록 신나게 떠들 수 있겠지만, 오늘은 영 내키지 않았다.

꿈은 꿈일 뿐이야.

예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희는 이 고독을 절대로 느낄 수 없다. 환상과 현실을 단번에 가르는 나희의 명료함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명료함은 결국 몰이해에서 온다. 같은 장소만 맴돌게 되는 이 막막함을, 모조리 포기하고픈 이 강렬한 충동을, 답을 찾고 싶지만 어떤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막연함을, 나희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림은 나희와 팔짱을 끼고 조잘조잘 떠들어도, 맛있는 걸 먹고 예쁜 옷을 사도,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예림은 기합을 넣으며 힘차게 일어났다. 모처럼 이 집에 혼자 남았으니 눈치 보지 않고 거품 목욕을 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음악도 틀어놓고, 노래도 크게 부르면서.

‘꿈은 꿈일 뿐이야.’

머리가 다 마를 때까지 예림은 나희의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했다. 보송보송한 몸을 침대에 누이니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식이 사라질까 두려워 일부러 한참을 뒤척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침대가 아닌 달리는 차 안이었다. 사방을 메운 침엽수들이 차가운 황금빛 피를 흘리며 노려보는 꿈일 때도 있었다. 아니면 도로에 홀로 남아 부모님을 소리쳐 부르거나, 끝없는 차선을 따라 다리가 제멋대로 춤을 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닿을 수 없는 목적지. 열리는 법 없는 검은 대문. 꿈을 꾸면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면서, 미끄러지고. 수천 번 수만 번 되풀이하던 자기 암시는 어느덧 다른 의문이 되었다.

꿈이 과연 꿈이기만 할까?



연휴가 끝난 뒤, 예림은 일찌감치 등교했다. 왠지 교실에 불청객이 먼저 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예상대로 복도에 서 있는 미윤이 보였지만, 깜짝 놀라 그만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말았다. 미윤이 윤기나는 긴 머리카락을 목뒤로 넘기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며칠 전 내 모습, 소문내기만 해 봐. 작정하고 네가 죽고 못사는 남친 뺏을 테니.”

교실로 들어가기 전 캡 모자를 예림의 손에 꼬옥 쥐어주고, 미윤이 속삭였다.

“정말 재수 없어. 너.”

쥐고 있는 모자의 천 소재 말고도, 마른 가랑잎 같은 게 만져졌다. 예림은 손을 펴보았다. 두 번 접힌 만원 지폐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만원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을 애써 외면하며 돈을 줍고 교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걸고, 잠시 고민하다가 모자는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사물함에 넣었다.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 살며시 라이터를 꺼냈다. 음각된 이니셜을 공연히 쓸어보았다. 이상야릇한 이번 연휴를 되짚어보다가, 외로움이 사무칠 바에야 고모의 뜻에 한 번은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설 연휴에 엄마가 좋아했던 동백꽃을 들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