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0화. 예림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일어나. 송예림.”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스로 눈을 떴다. 고모가 이불을 홱 걷자 갑작스러운 한기가 들었다.

“정말 부모님 뵈러 안 갈 거니?”

예림은 대꾸하는 대신 양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누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능하면 내일 아침 일찍 들어오마. 그러니 함부로 외출하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도록 해.”

고모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예림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있는 힘껏 무게를 실어 침대보에 몸을 날렸다. 콧김을 내뿜으며 베개를 퍽퍽 쳤다. 결국 그 날이 오고 말았다.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예림은 추석 연휴에 홀로 남겨질 상황을 미리 염려하지 않으려고 했다. 실제로 회피에 관한 일체의 노력은 효과 만점이었다. 집안에서 내쫓긴 고모의 처지가 안타까운 사고로 고아가 된 조카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는 정신 승리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림은 고모의 차가 동네를 빠져나가고 나서야 1층으로 내려왔다. 텅 빈 식탁을 응시하며 그토록 외면한 현실을 뒤늦게 직시했다.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아미는 전부 잃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명절다운 명절로 채울 수 있었다. 예림은 무심코 입을 벌려 소리를 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이나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막막한 적막뿐이었다. 견딜 수 없어진 예림은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곧바로 지갑을 챙겨 높다란 담벼락을 따라 비탈길을 내달렸다.



마을버스 뒷좌석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빠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쥐었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확인해보면 전부 해운의 문자메시지였다. 평소라면 반가웠겠지만, 지금은 그의 문자에 답하기 싫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예림은 버스기사 쪽을 곁눈질했다. 저 아저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모두가 쉴 때도 일을 하는 걸까.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걸까.

예림은 익숙한 건물과 생경한 간판 밑을 걷고 또 걸었다. 기름 섞인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길을 지나, 검은 대문 앞까지 다다랐다. 반쯤 열린 다른 집 대문에서 어렴풋한 말소리와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검은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집은 적적하기만 했다. 옥상까지 수많은 가지를 뻗은 감나무는 바싹 말라있었다. 예림은 올해 그 나무에서 감이 열렸을지, 열렸다면 그 감은 누가 처리했는지 궁금했다. 뒤에서 동네 주민의 헛기침이 들렸다. 동시에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수군거림도 들렸지만, 예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낙엽이 가득한 마당과 어두운 집을 기웃거렸다.


때마침 해운의 전화가 왔다.

[아, 진짜 재미없다. 빨리 올라가서 예림이 보고 싶다. 듣고 있어? 너무 보고 싶어.]

예림은 순간 닭살 돋는 상상을 했다. 신해운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명절을 보내는 상상 속 자신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그런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예림은 최대한 명랑한 말투로 해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넌 어디야?]

이 간단한 질문에도 떳떳하게 대답할 수 없는데, 과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평범해 보여야 했다. 지금은 신해운의 여자 친구를 연기해야 하니까. 그 여자 친구는 부모님이 멀쩡히 계시고, 부모님에게 계속 사랑받는 아이일 테니.


대문을 향해 손을 뻗자 오돌토돌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집이 다른 이의 소유가 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의 거짓말은 해도 되지 않을까?

“집이야.”

[어? 너희 큰집이었어?]

“...응. 그래서 시끄럽고 정신없다. 우리 문자나 하자.”

진짜 큰집까지 가려면 평소에 네다섯 시간이 걸렸다. 명절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그 두 배가 걸렸다. 예림은 그 지지부진한 노정이 힘겨웠다. 특히 구불구불한 산속 도로를 따라 빙글빙글 돌다보면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일어난 후 여태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아빠를 끔찍이 아끼셨다. 고모도 아끼셨지만 끝내 내친 걸 보면 아빠만큼의 애정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예림은 검은 대문에서, 영영 붙잡을 수 없는 세월에서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세상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어도, 감춘 손으로 아빠의 이니셜을 닳도록 매만져도, 진실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니 앞으로 할머니를 뵐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훼손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이상, 예림은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예림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을 걸었다. 짧은 시간동안 거리는 꽤 많이 변했다. 엄마와 종종 들렸던 베이커리가 사라지고 동물병원이 운영 중이었으며, 친구들과 자주 갔었던 패스트푸드점은 꽤 근사한 2층 카페로 탈바꿈되었다. 커피 냄새를 맡으며 걷던 중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렸다. 예림은 멈춰 서서 주변을 살폈다. 거리에 행인은 적었고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예림은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갔다. 웬 또래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잘린 아이의 머리를 보자 예림의 두 손이 분노로 차갑게 식었다. 점퍼 밑으로 내놓은 다리엔 멍 자국이 보였다.

“괜찮아요?”

예림이 112를 부르려고 하자 여자아이가 만류했다. 그의 얼굴이 낯이 익어 예림은 미간을 좁히고 그의 이목구비를 뜯어보았다. 상대방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아이가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예림을 여자아이가 붙잡았다.


“송예림, 가지 마.”

여자아이가 눈물을 닦고 잘린 머리를 더듬었다. 예림이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어 내밀자 냉큼 모자를 받아 썼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모습을 절대 들키기 싫은 상대에게 보인 걸지도 모르는데, 아이 특유의 거만한 표정은 여전했다.

도미윤은 빈틈이 없는 여자애였다. 교복을 적당히 보기 좋게 줄여 입고, 매일같이 긴 머리를 공들여 만지던 아이였다. 전교권인 나희를 이기기 위해 공부도 치열하게 했다. 예림이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도미윤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 애가 겉과 속이 다른 애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거 돌려주지 않아도 돼. 우리 서로 못 본 셈 치자.”

“가지 말라니까?”

“이게 뭘 잘못 먹었나.”

별안간 천둥소리가 들렸다. 미윤은 얼굴을 붉히며 배를 감쌌다.

‘나에게 우는 거 들킨 건 괜찮고, 배꼽시계 울린 건 부끄러운 건가? 진짜 특이하네.’

예림은 미윤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는 미윤의 앞에 방금 계산한 커피 두 개를 놓았다. 대체 누가 이 애를 때린 걸까. 머리는 누가 이렇게 악의적으로 잘라 놓은 걸까. 혹시 부모님이 그랬을까? 게다가 H동 산다고 들었는데, 왜 거기에서 울고 있었던 거지? 이제 보니 얘 너무 말랐다. 미윤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을 억누르며 예림은 찻길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두 아이는 편의점 파라솔 밑에서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미윤이었다.

“고마워.”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지.”

“내가 해운이와 사귀는 게 그렇게 싫니?”

“야, 나 너처럼 남자에 미친 애는 아니거든?”

다소 쌀쌀맞은 말투였지만 유쾌한 어조의 대답이었다. 예림은 용기 밑바닥에 남아있는 커피를 쪽쪽 빨아올렸다. 달달한 마지막 한 입을 삼킨 뒤,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얘기를 꺼냈다.

“난 너한테 아무 감정 없어.”

“...그러시겠지.”


미윤이 모자를 벗고 다시 머리를 매만졌다. 삐뚤빼뚤한 머리가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꼴을 누가 볼세라 서둘러 접이식 손거울을 꺼내주었다. 거울을 본 미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이 하소연인지 혼잣말인지 헷갈려서 예림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이 조우가 무엇했다. 예림은 이 꺼림칙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곰곰이 파고들었다. 궁금하지 않은 남의 사생활을 알게 되어 불편한 걸까? 그런데 목격한 정황이 과연 사생활로 치부되고 말 일일까? 좀 더 미윤의 이야기를 듣고 개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사뭇 다른 관계가 되는 건 부담스러웠다. 역시 그에게 밖에서 얼마간 더 버틸 수 있는 아량을 마저 베풀고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을까.

“송예림, 내가 널 왜 싫어하는지 알아?”

미윤이 손거울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예림은 미윤의 속마음이 거기에 있기라도 한 듯 거울을 열었다. 그러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죄인이 비칠 뿐이었다.

“너를 봐. 외모, 유복한 집, 잘난 남자 친구까지. 넌 다 가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