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9화. 나희는 독점하고 싶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여름 방학 보충 수업 외에 나희는 스터디 모임에도 빠짐없이 나왔다. 지난 1학기 때 수준별 수업에서 친해진 여자애들과 만든 모임이었다. 입시를 단념하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로, 나희는 부모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돌려 받기 위해 더욱 성적 관리에 힘썼다. 웬일로 방학 동안 예림의 연락도 없어 마음껏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터디 멤버인 도미윤이 예림의 소식을 전하기 전까진.

“어머나, 네가 몰랐단 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묻고 있지만 도미윤은 이 상황을 분명 즐기고 있었다. 나희는 예림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랑 신해운이 사귄다던데, 사실이야?]

곧바로 예림의 답신이 왔다. 나희는 내용을 확인만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미윤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남자랑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너는 까맣게 잊은 거야?”


나희는 잠자코 아이스초코를 마시며 단어장을 펼쳤다. 미윤의 빈정거림을 들을 시간에 영어 단어 열댓은 더 외우는 편이 나았다.

“참 세상 편하게 살아. 네 친구는. 그 얼굴과 남자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나 봐.”

아슬아슬하던 미윤의 말이 선을 넘었다. 멤버 중 미윤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나희는 얼음을 아드득 씹으며, 유리컵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송예림의 연애 사업 소식을 업데이트했어. 이제 만족하니? 이걸 잘난 네 얼굴에 집어 던지면 더 만족스럽겠지? 시간이 없어서 아쉽구나.”


가방을 찢다시피 열어젖히고 테이블에 널린 책과 필기구를 쓸어 담았다. 떠나기 전에 미윤에게 쏘아붙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신해운에게 거절당한 건 네 사정 아니니? 괜히 엉뚱한 데에 화풀이하지 말아.”

“나희야. 잠깐만 기다려.”

강희진이 나희를 붙잡았다. 그는 스터디 멤버 중 가장 잘 맞는 아이였다. 나희는 미윤과 다른 아이들을 노려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희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린 그동안 송예림이랑 친해지려고 노력했어. 걔는 잘 웃고 성격도 좋지. 그런데 그뿐이야. 걔는 ‘난 지금 너희를 견디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대하는-.”


“연나희, 난 네가 왜 자처해서 시녀가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다시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미윤은 한껏 도도한 눈빛을 했다.

“왜 시녀가 되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난 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너와 송예림 둘 중 누가 상대의 덕을 더 보고 있을까? 미래를 위해 쪄 죽는 여름에도 기어 나와 공부하는 너? 아니면 지금도 남자애랑 시시덕거리고 있을 걔? 공주처럼 군다는 이유로, 걔가 정말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왜 시녀를 자처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걔가 대체 뭐라고.”


테이블 위로 정적이 감돌았다.

“아, 그리고 난 걔 줘도 안 가져. 두들겨 맞던 앤 취향이 아니라서.”

신랄한 미윤의 말에 멤버들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희진을 비롯한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희를 향했다. 나희는 말문이 막힌 채 카페를 나왔다. 타산적인 가치관을 당당히 드러내는 애는 처음이라 기가 막혔다. 애초에 자신과 예림 사이에 서로 혹할 만한 뭔가가 있었던가? 나희는 그 문제 대신 예림과 해운에 관해 골몰했다. 오전 내내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신해운이나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찾아왔던 송예림이나 얼마든지 자신에게 교제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서운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연락처 목록에서 예림을 찾았다. 예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희는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희의 엄마는 언제나 나희를 참아주었다. 딸이 가끔 데리고 오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나희의 엄마는 예림이 오면 곤혹스러워하다가도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예림은 행복한 삶을 박탈당한 아이 취급을 받는 내내 조용히 웃기만 했다. 나희의 엄마는 딸과 단둘이 남으면 바로 가면을 벗어 던졌다. 딱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끔찍한 아이라고 진저리를 쳤다. 그럴 때마다 나희는 자신이 집에서 을이라는 사실을 잊고 엄마와 말다툼을 벌였다.

“그 애가 혼자 살아남은 게 그렇게 못마땅해요?”

나희가 그렇게 소리친 날, 엄마는 한 달 동안 나희의 용돈을 끊었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고 나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두드려도 예림이 답이 없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구들은 최소한으로 비치되어 있고, 장식품도 얼마 없는 집이었지만 그 중 예림의 방이 가장 공허한 공간일 거라 짐작했다. 검은 옷장과 서랍장, 하얀 침대와 책상만이 있는 공간은 마치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호젓한 눈밭을 연상시켰다. 예림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나희는 의자를 빼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책상엔 지포 라이터가 덩그러니 있었다. 예림이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바람에 같은 반 여자애에게 오해를 살 뻔했던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밝히기 싫었던 모양인지 예림은 묵묵부답이었고, 다행히 그 아이는 자기 교복 재킷 안주머니 부근을 톡톡 치며 웃어넘겼었다. 어쩌면 도미윤이 운운한 공주와 시녀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을지도 몰랐다. 예림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화가 풀렸기 때문이다.



“미안해.”

“고작 네가 신해운과 사귀는 걸 가지고 화가 났다고 생각해?”

사실 그것 때문에 화가 났었다. 하지만 예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네가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고, 이 특권을 가능하면 오래 만끽하고 싶었다고, 신해운과 네 시간을 공유해야 하는 앞날을 생각하면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상상만 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난 그저 이해가 안 가는 거지. 다른 애들은 다 아는 걸 왜 나만 몰랐을까?”

말을 끝맺자마자 저절로 답이 떠올랐다. 방학 내내 친구에게 소홀했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나희는 도량이 넓은 친구로 보이고 싶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내가 바로 얘기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믿어줘. 난 다른 애들에게도 얘기한 적 없어.”

예림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다크서클과 창백한 안색이 드러났다. 나희는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손톱자국이 선명한 두 팔, 흐트러진 옷매무새, 화사한 가면 뒤에 존재하는 불안이야말로 나희가 진정 원하는 거였다. 바로 이런 예림이 보고 싶었다.

“요즘 내 상태가 말이 아니야. 계속 같은 꿈만 꾸거든…”

눈물을 글썽이며 예림이 말을 이었다.


“한동안 괜찮았거든? 이미 알고 있는데… 집에 영영 도착할 수 없는, 그런 꿈만… 계속…”

나희의 눈시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신해운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리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춰진 이 모습을.

“이제 됐어.”

예림을 끌어안고 나희가 속삭였다.

“꿈은 꿈일 뿐이야.”


곧 기운을 차린 예림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두 소녀는 대문을 열고 나와 높다란 담장을 따라 내려갔다. 예림의 배웅을 받으며 나희는 버스에 탔다. 나희는 예림이 비싼 새 옷과 화장품을 자랑하면서도 어째서 가끔 쓸쓸한 얼굴을 하는지, 어째서 학원에 가야하는 자신을 붙잡고 한참을 놔주지 않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또래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에 취하려고 노력했는지, 어떤 기분으로 고모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생활하는지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나희는 다음 스터디 일정을 정하기 위해 희진에게 문자를 보낸 뒤, 창밖을 보며 머리를 식혔다. 예림이 산산조각 나는 이유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치기에 불과했다. 자기가 줄 수 없는 걸 신해운 같은 녀석에게서 채워도 좋으니, 결국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예림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