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8화. 표은은 그 미소가 거슬린다

[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by 선명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여왕의 몸을 물어뜯는 이들은 노예가 필요한 다른 종의 개미가 아니었다. 하물며 연합을 맺은 다른 여왕이 낳은 자식들도 아니었다. 여왕을 공격하는 이들은 여왕이 직접 낳은 개미들이었다. 여왕은 있는 힘껏 버둥거리지만, 이내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산(酸)을 뿌릴 필요도 없이, 개미들의 턱만으로 여왕의 몸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개미들은 정연한 몸짓으로 여왕을 해체하고, 성의 일부와 그들을 통제하던 여왕물질은 사라져 갔다.

여왕개미는 군체의 진정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원표은은 책을 덮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여왕을 죽인 개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중학교 동아리 전시회를 앞두고 표은은 그림을 그렸다. 개미들에게 뜯어 먹히는 여왕개미의 그림이었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가 잠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그림이 전시된 뒤였다. 미술 교사가 천재적이라 일컬었던 표은의 장점들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광기에 불과했다. 표은은 사람들이 칭찬하든 비난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졸업하면 안 볼 이들이었으니까.


방과 후, 전시회로 쓰이는 교실에서 홀로 서 있는 여자애를 발견했다. 명찰 색을 보니 동급생이었다. 여자애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에 매료된 듯 손을 뻗어 여왕의 겹눈과 가슴을 쓰다듬었다가, 절단된 다리와 몸을 매만졌다. 표은은 그 애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 볼 필요도 없는 그림이야.”

여자애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여자애와 자신의 신장 차가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랫배가 죄어드는 감각을 모르는 체하며, 표은은 여태 들어왔던 비난을 자신의 견해인 양 늘어놓았다.

“이걸 그린 녀석은 분명 제정신이 아닐걸.”

“이 애는 그저 그림을 그렸을 뿐이야.”

담백한 대답이었다. 감상을 방해 받기 싫은 듯 여자애는 거리를 벌렸다.

“난 좋아. 이 그림.”


그 말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표은은 그 애의 이름을 눈에 담아두었다. 송예림이란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주제에, 그림을 감상하던 분위기는 꽤 세련되었다고 평했다. 그날 이후로 송예림과의 접점은 없었다. 교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표은의 시선만 방향을 잃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학년 4반이었던 송예림이 12반 교실까지 꼬박꼬박 찾아왔다. 네가 이런 외진 곳까지 오다니 놀라 자빠지겠다며 방정을 떨던 송예림의 친구도 점차 송예림을 지겨워했다. 송예림은 교과서든 체육복이든 꿋꿋하게 핑계를 대며 친구를 볶았다. 가끔 표은은 가슴이 철렁했다. 송예림이 이쪽을 힐끔거리곤 했던 것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첫 만남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송예림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했을 땐 계절이 바뀐 뒤였다. 표은은 눈이 쌓인 돌계단에 공연히 발자국을 남겼다. 난생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에 고요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교무실 청소를 하던 표은은 송예림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졸지에 부모님까지 잃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졸업식 때까지 송예림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송예림이 죽었다는 뜬소문까지 들렸다. 짝사랑이자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 감정은 스케치북을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첫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더 이상 송예림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표은은 우연히 엄마의 방에서 발견한 서류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되살아난 트라우마에 모든 사물이 빚이 바랬다. 몇 년간 그려온 그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송예림도 쉽게 잊혔다.

모든 게 시시해졌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딱 한 주가 흘렀다. 자질구레한 집안일과 수열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표은은 붙박이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았다. 꽃을 파고드는 벌처럼 에어컨 바람을 누리는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화젯거리가 들려왔다. 그와 빈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앉은 커플이 여름 방학 보충 수업에 관해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커플은 같은 모운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수열이 학교 보충 수업을 신청할 리 없으니, 표은도 기꺼이 보충 수업을 듣던 참이었다. 표은은 고개를 갸울고 커플을 관찰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신해운과 송예림. 어찌나 선남선녀인지 비위가 상할 지경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둘이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돌연 카페 직원이 커피콩을 분쇄했다. 표은은 두 사람의 음성을 한 자라도 놓칠세라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빠보다 엄마가 더 얼굴 보기 힘들어. 아빠는 일찍 들어오실 때도 있는데, 엄마는 꽃집을 운영하시거든.”

“꽃집 딸이라니 너한테 정말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네.”

“풉. 그게 무슨 소리야.”

“가게 구경하러 가도 돼?”

“나중에. 부모님이 보수적인 편이라… 아직 네 얘길 못 했거든.”


거짓말.

표은의 심연에 날아온 돌이 파문을 일으켰다. 송예림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표은은 일렁이는 물결을 들여다보며 이 난데없는 확신의 근거를 찾았다. 곧 어렵지 않게 중학교 생활 막바지에 교직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졌던 소문을 떠올렸다. 그랬다. 목전에 앉아 있는 송예림이 그 소문의 당사자였다. 표은은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떨었다. 뻔뻔할 정도로 생글생글 웃으며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인 거짓말을 하고 있다니. 그건 개그가 따로 없었지만, 송예림의 미소만큼은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고아 주제에 뭐가 그리 행복하다고 실실 웃고 있는 걸까. 표은은 치욕으로 새빨개진 예림의 얼굴과 치부가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작태를 보고 싶었다. 일단 실컷 눈요기나 하기로 했다. 역시 예쁜 여자애는 다소 충동적이고 멍청해야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