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지수열의 커터칼이 원표은의 손허리뼈 사이를 호볐다 족족 긋기를 반복했다. 표은은 조금씩 벗겨지는 표피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구타당하며 지낸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수열이 칼을 들고 찾아올 때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수열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얼굴에 주먹을 꽂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인내심을 갖고 참아주었다. 가끔은 이런 무가치한 일도 시간을 죽이기엔 적격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칼날의 움직임을 앞지르려고 하는 듯한 손등의 신경도 야릇했고,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수열도 좀 더 볼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을까? 설마 툭하면 두들겨 패고 짓밟고 피를 보는 게 이 멍청이의 전부겠는가. 그렇다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수열과 표은이 본격 가학행위에 몰입하려는 순간, 닫힌 안방 문 너머로 인기척이 났다. 수열은 즉시 칼날을 도로 칼집에 넣고 오그린 다리 아래 두었다. 표은도 피투성이 손을 탁자 밑에 숨겼다. 곧바로 잠옷 위에 얇은 카디건을 걸친 백주연이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수열이 주연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커터칼로 남의 살을 쑤시던 망나니가 잘도 남의 엄마 앞에서 수더분한 학생의 모습을 연출했다. 저 재능을 십분 활용해 처신만 적당히 잘했어도 그가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소년은 주연이 출근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연기를 계속했다. 친구네 놀러 온 평범한 소년의 연기와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끝내 놓은 착한 아들의 연기는 효과적이었다. 주연은 두둑한 용돈을 표은에게 건넸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주연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두 소년은 입을 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그들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가려진 채 무대 위로 끌어올려진 가엾은 사람. 한 때 본인이 관객이었다는 자각조차 못 하는 여인이었다.
“너희 엄마는 언제 봐도 조그맣다. 어떻게 너를 낳았지? 알고 보니 계모 아냐?”
“애석하게도 친모야.”
표은은 여전히 끅끅대는 수열을 내버려두고 구급함을 열어 상처를 소독했다. 하도 정성스럽게 살을 깎아 놓아서 의사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은 궁금했다.
“저런 조그만 아줌마를 괴롭힐 구석이 대체 어디 있냐? 너같이 이상한 새끼는 처음 본다.”
이상한 새끼가 애먼 사람을 이상한 새끼로 몰았다. 표은은 어깨를 들먹이고 손에 붕대를 감았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데 이유가 있어야 할까? 이유까지 만들 고로는 필요 없었다. 아들의 친구가 실은 아들을 두들겨 패는 양아치였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열에게 스스로 폭행당하길 원했다는 고백을 직접 아들의 입으로 들을 때, 그 반응이 가장 압권일 것이다. 호흡이 얼마나 가빠질까? 안색은 얼마나 창백해질까? 일그러지는 얼굴도 나쁘지 않겠고, 우는 얼굴도 괜찮겠다. 아마 따귀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표은은 상상하지도 못한 반응을 엄마가 보여주길 원했다. 그 설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살이 찢겨도 좋았고 피를 토하도록 얻어맞아도 좋았다.
수열은 커터 칼 그립을 밀고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리며 칼을 던져버렸다. 표은은 염증이 치밀어 오른 듯한 그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게 수열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수열이 표은의 멀쩡한 다른 쪽 손을 움켜잡았다.
“야, 손가락 마디 하나만 잘라 보자.”
신해운인가 뭔가 하는 녀석처럼 애원하기라도 바라는 걸까? 표은은 수열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잘린 단면이 어떻게 생겼을지, 피는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지 않냐?”
하마터면 실소가 새어 나올 뻔했다. 저 골빈 녀석은 날붙이로 인간의 신체를 자르는 일이 조금 전 본인이 한 짓거리와는 전혀 다른 무게라는 이치를 전혀 몰랐다. 모르니 허세를 부리며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것만 못한 행동을 했다.
“네가 내 손 불구로 만들고 나면, 당분간 네 방 청소는커녕 밥도 못 해줄지도 몰라.”
“…아, 사는 게 뭐 이리 지겹냐.”
수열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엄마도 집에선 안 피워. 잠깐 나갔다 와.”
표은은 수열의 발길질을 피하며 미처 닦지 못한 피를 훔쳤다. 일부러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피로 물든 휴지를 흔들었다.
“내 사용기한도 이제 지난 건가?”
수열이 욕설을 내뱉고 밖으로 나갔다. 지수열은 요즘 신해운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신해운이 연애를 시작했고, 상대가 미모가 출중한 동급생이라는 소문을 듣고 반시간 동안 자신을 두들겨 팰 정도였다. 확실히 그 여자애는 예쁘긴 했다. 하지만 결국 지수열 앞에서 잔뜩 긴장했던, 배짱이라곤 전혀 없는 계집애였다. 신해운이 갖고 싶으면 평소대로 난장 치면 그만 아닌가? 표은은 수열이 그토록 몸을 사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를 쓸데없이 자극하진 않기로 했다. 기어코 잘린 손가락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쩔쩔매며 엄마를 기다리는 건 달갑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