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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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출중한 외모, 상위권인 성적, 좋은 교우 관계. 학교는 능력을 뽐내는데 제격인 무대였고, 그 누구도 훼방할 수 없는 완벽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해운에게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해운은 불을 켜지 않고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벽과 세면대를 더듬어 거울을 향해 섰다. 거울은 무결한 검은색이었다. 얼음 같은 표면에 열기가 오를 때까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몸이 녹아 이 공간의 암흑과 섞여버렸으면 했다.
이 날은 해운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아무리 부모님 몰래 더러워진 교복을 빨고, 러닝셔츠에서 핏물을 빼도, 미물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 그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지울 수 없었다. 그새를 못 참고 토기가 올라왔다. 해운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끊임없이 구역질을 했지만, 입안에 달라붙은 벌레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혀인지, 뒤통수를 거칠게 누르던 지수열의 역겨운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헤아리려 하면 할수록 그닐거리는 감각이 입안을 헤집었다. 흐느낌을 들을 이는 없었지만, 해운은 변기를 붙잡고 숨죽인 채 울었다. 문득 격렬한 공포가 덮쳐왔다. 해운은 허둥거리며 문손잡이가 닿자마자 급히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사물들이 제각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따사로운 금빛 햇살 속에서 해운은 커지는 울음소리를 내버려두었다. 한때 상처가 아물지 못한다면, 그대로 칼날이 되어 심장까지 치밀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해운은 나약해 빠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대로 무력하게 당하기만 할 순 없었다.
“그 녀석이랑 같은 고등학교로 배정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가방 속에 칼이라도 넣고 다닐 거야.”
세지의 질문에 해운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옥 같은 생활 제2막이 펼쳐진다면 일찌감치 수열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면 됐다. 그렇게 다짐하니 거짓말처럼 성장통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달라진 자기 모습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만난 아이들이나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나 부담스러운 호의를 보였고 느닷없는 질투의 눈길을 던졌다. 모든 반응이 생소하기만 해서, 천편일률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끌고 갈 줄 알았던 지수열마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러나 주차장을 가로지를 요량으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 자신은 여전히 변함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학기 내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수열에게 미묘한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후미진 곳을 피해 다니곤 했던 자신의 모순을 인정해야 했다. 수열이 해맑게 웃었다.
“요즘 재미 많이 보고 있더라?”
머릿속이 새하얘져 해운은 입술만 깨물었다. 최악의 조우였다.
해운은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지만, 수열은 해운의 앞에서 평소대로 행동했다.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해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수열은 해운의 반응을 떠보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손등을 꾹꾹 밟았다. 수열과 마주친 순간부터 해운은 절대로 그가 바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지수열은 원하는 관심을 얻지 못한다면 저 손등을 담뱃불로 지질 위인이었다. 해운은 결국 하느니만 못한 저항을 했다.
“그만 둬. 제발.”
수열은 만족스러운 듯 발을 높이 쳐들어 손등을 콱 밟았다. 수열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년이 참고 있던 신음을 토해냈다. 해운은 결국 그 소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원표은. 지수열이 새로 만든 샌드백이었다. 저런 건장한 체격으로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당하고 있는 걸까? 수열은 쭈그려 앉아 피우고 있던 담배를 원표은에게 물렸다. 얼결에 들이마신 담배 연기에 표은이 콜록대자, 수열이 그의 등을 걷어찼다. 수열의 발길질이 무서운지 표은은 즉시 담배를 주워 입에 물었다. 다시 기침이 나오려고 하자 수열이 으름장을 놓았다. 표은이 담배를 한 모금 빨 때마다 수열은 손뼉을 쳤다. 어이구, 내 새끼. 잘 피우네. 많이 피워야 성장판이 닫히지. 헛소리를 반복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불현듯 지수열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쪽을 보았다. 그의 몸짓은 마치 채집한 곤충의 날개를 뜯다가 어른에게 들켜 두 손을 감추는 아이 같았다. 반성의 기미는커녕 의기양양한 눈빛을 빼면 그랬다.
“안 가고 뭐하냐?”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한 말투에 해운은 얼굴을 붉혔다.
“맞다. 넌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갔었지. 개새끼가 따로 없었어.”
해운은 등을 돌렸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 같은 얼굴을 즐겁게 일그러트리다가도, 불현듯 광기 어린 눈빛을 하는 지수열은 여전했다. 질리도록 공격적이었다. 수열의 말은 끝까지 해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난 그런 개새끼가 참 귀여웠는데.”
해운은 걸음을 빨리했다. 지수열은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두들겨 패는 미친 짓거리를 계속할 것이다. 무엇보다 수열의 새로운 샌드백이 한때 부러워했던 외양의 남자애라는 점이 너무 거슬렀다. 자신이 교사들의 신임과 동급생들의 선망을 받는 존재로 탈바꿈된 사실은 수열에게 어떠한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결국 끝난 게 아니었다.
수열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녹음 밑으로 들어갔다. 발치에 개미 떼들이 지나갔다. 그 행렬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해운은 욕실에서 숨죽여 울던 자신의 목을 졸랐다. 흉터투성이 몸은 욕조에 처박았다. 일사불란한 행위로 점철된 몽상을 끝내고, 해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구석으로 밀려 나간 울음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