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넌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고
[안내]
총 69화로 완결된 장편소설입니다.
사건 이후, 끝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해운아, 아줌마는 널 볼 때마다 목이 아파.”
민채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해운을 올려다보았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동안 성장통을 겪었다더니, 또래보다 키가 작고 왜소했던 과거는 아예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같이 살고 있는 나도 그래. 아무리 내 자식이라지만 경이로울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연경이 해운의 등을 쳤다. 짓궂게 말하면서도 연경의 두 눈은 해운에 대한 애정으로 빛났다. 민채는 숄더백 끈을 재차 쥐었다. 하연경과 신해운, 그 둘은 질투가 날 정도로 보기 좋은 모자였다. 학부모 상담 이후 연경은 퍽 기뻐 보였다. 듣자 하니 해운은 성적도 상위권인 데다 교우관계도 좋다고 했다. 그에 비해 딸아이가 듣는 평은 심성이 착해 궂은 일을 나서서 한다는 게 다였다. 민채는 그 평이 특출난 구석이 전혀 없는 학생에게 하는 겉치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민채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가 저녁을 먹고 씻자마자 방문을 잠갔다는 이유로 남편이 새벽 내내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딸이 제 아버지를 경멸한다는 사실을. 민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지는 학교생활 잘 하고 있니?”
“어… 잘 모르겠는데요. 반이 달라서.”
해운은 민채의 시선을 피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민채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고 싶었지만 입학식 이후로 세지와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며칠 전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세지와 조우한 일은 특별한 경우였던 셈이었다.
“그래도 가끔 마주치면, 애들이랑 잘 어울리고 있던걸요.”
“요즘 세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해운이는 세지가 밖에서 어떤지 알까 싶어 물어 본 거야. 신경 쓰지 말렴.”
푸른 원피스에 하얀 볼레로를 갖춰 입은 민채가 엄마보다 훨씬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며 해운은 민채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해운은 세지와 친해지고 싶다는 예림의 말과 나희의 평판, 나희와 자주 어울리는 여자애들의 이미지를 곱씹었다. 나란히 서 있는 세지와 예림을 상상하니 어마어마한 괴리가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세지는 정말 아주머니와 닮은 구석이 없네요.”
당황한 민채의 얼굴을 보며 해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실언이었다고 둘러대려던 해운을 연경이 막아섰다.
“한창 말 안 들을 때지 뭐. 세지나, 해운이나. 자기도 기억하지? 해운이 중학생 때-.”
사람이 많은 밖이었고, 주말 한낮이었다. 해운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는 중학교 시절을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졸업앨범을 받자마자 소각장에 내버렸을 정도였다. 엄마는 그런 사정을 몰라주고 항상 그 화제를 꺼내려고 했다. 자기 기분을 3년 내내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주머니, 세지 집에 있죠?”
민채에게 열쇠를 건네받자마자 해운은 걸음을 빨리 했다.
“먼저 가 있을게요. 두 분은 천천히 오세요.”
“눈길 한번 안 주는 거 봐. 저럴 땐 정말 내가 아들을 낳은 건지, 남을 낳은 건지.”
거리가 제법 벌어졌는데도 엄마의 푸념이 들렸다. 해운은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발끝에 닿은 깡통을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해운은 제집처럼 문을 따고 들어와 세지를 소리쳐 불렀다. 세지는 나오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자는 모양이었다. 해운은 세지의 방문 손잡이를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예전처럼 거리낌 없이 세지의 방문을 열어젖히기엔 몸이 너무 커버렸다. 무엇보다 어른들이 세지와 자신이 어렸을 때처럼 허물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반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시시껄렁한 우스갯소리를 멈추지 않는 세지의 아버지는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해운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목을 뒤로 꺾어 젖혔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 집에 어른은 없으니 지나친 숙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세지의 방엔 햇빛이 여간 들지 않았다. 해운은 벌꺽 커튼을 쳤다. 밝은 햇살 아래 세지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해운은 이불 밖으로 나온 손바닥에 자기 손을 포갰다. 세지가 소스라치는 걸 보며 해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생일선물 주러 왔지.”
세지가 의아한 얼굴로 손에 쥐어진 USB를 뜯어보았다.
“굳이 내 방에 들어와 이래야겠냐? 막 자다 일어났는데….”
세지는 무릎에 턱을 괴고 해운을 흘겨보았다. 무슨 영국 드라마에 나오는 신사처럼 책상의자를 빼는 정중한 몸짓이라니, 아침부터 이상한 걸 주워 먹고 나온 게 분명했다. 세지는 그를 빨리 내보내고 싶어 이불에서 나왔다. 브래지어를 벗어 둔 상태라는 걸 깨닫자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의자에 걸린 카디건을 입었다. 그런 뒤 그의 장단에 맞춰 우아한 태도로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몇 분 뒤, 보기만 해도 수상한 지빠귀 폴더 주변으로 세지가 마우스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해운 너, 제정신 아니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구는 해운을 향해 세지는 베개를 던졌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면 이런 짓을 해? 이런 거 너나 실컷 보라고!”
“난 그런 취미 없어! 온전히 네 취향을 생각해서 가지고 온 거야. 내 맘을 그렇게 모르겠냐?”
“야, 당장 나가. 그런 끔찍한 콧소리는 네 여자 친구 앞에서 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해운의 모습에 화가 쉽게 풀렸다. 해운이 조금 전 발언에 관해 묻자 세지는 고개를 돌렸다. 이 따위 영상이나 받자고 신해운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게 아니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자고 있는데 주말 아침부터 다짜고짜 쳐들어와 불쾌한 일을 벌이는 녀석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화를 내는 건 제힘만 빠지는 일이었다. 울적해진 세지는 충동적으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우등생이란 놈이 참으로 쓸데없고 멍청한 생일선물을 준비했다. 세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상하네. 너와 송예림이 사귄다는 소문을 너만 몰랐구나. 걔가 얼마나 유명한데!”
송예림. 그 이름을 육성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세지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보니 포르노가 아닌 영화 속 장면이었다. 세지는 열띤 배우의 얼굴에 며칠 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송예림을 겹쳐 보고 있었다. 상대의 등줄기를 간질이는 송예림의 머리칼. 숨이 멎은 듯 바닥에 떨어지다가도, 곧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 송예림의 두 팔. 수많은 종류의 숨결을 피워낼 송예림의 열정. 영상 속 신음은 계속되었다. 세지는 필사적으로 볼륨을 줄였다. 친구와 사귀는 여자애를 대상으로 이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신해운, 넌 너밖에 몰라. 정말 둔해.”
“…송예림이 그렇게까지 유명했다고?”
세지는 헛웃음을 치며 눈을 비볐다. 눈곱이 묻어 나온 손끝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가장 의기소침해하던 쪽은 신해운이었다. 세지는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 없었던 해운의 작은 손을, 소맷부리를 끌어 올려도 전부 가릴 수 없었던 해운의 상처들을 기억했다. 지금은 꼴 보기 싫은 녀석이어도, 결국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친구였다. 세지는 무심코 해운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가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해운에게 진정으로 화를 낼 순간이 오기는 할까 궁금했다.
“그 얼굴로 풀 죽어 있으니 정말 안 어울린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으니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힘 빼지 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해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대답했다. 자기암시를 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더 입을 열지 않았고, 세지도 딱히 이어나갈 화제가 생각나지 않았다. 세지는 다시 의자를 돌려 노트북 전원을 껐다. 이 어색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침묵이 될 터였다.
“우리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만 하는 게 좋겠다. 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거든.”
그렇게 말하며 세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졸업할 때까지 인사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해운은 선뜻 알겠다고 대답했다. 세지는 새까만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화면엔 바닥에 앉은 신해운이 비쳤다. 그는 노골적인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눈치챘어도 개의치 않고 지었을 미소였다.